이거 혹시... 미주신경성 실신입니까? 인생에서 가장 K-드라마 같은 순간 아닌지

2023. 2. 27. 22:13데일리로그

 

 

토할 것 같고 눈앞이 번쩍번쩍하면서 시야가 좁아지고 식은땀이 줄줄줄 났다. 온몸에 힘이 빠져서 더 걸을 수도 없었다. 아 또 이래...

대략 일 년에 한 번씩 아침에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이럴 때가 생긴다.

 

맨 처음 증상이 있었던 건 2017년 여름.

체중이 훅 줄었던 시기였는데, 오전에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저런 증상이 갑자기 나타났고 다리에 힘이 빠져서 훅 주저앉았다. 내 앞에 앉아 계시던 분이 급히 자리를 양보해 주셔서 기둥 붙잡고 앉아서 가다가 내렸다. 지하철역 출구로 나가니 햇빛이 너무 밝아서 눈을 못 뜰만큼 힘들었고 배가 무진장 아팠다. 화장실에 다녀오니 토할 것 같고 식은땀 나던 것도 좀 괜찮아졌다. 약속 장소까지 갈 때에는 정거장마다 아 여기서 내려서 돌아가고 약속 취소해야 하나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조금 쉬었더니 완전히 멀쩡해졌다. 더위를 먹었나? 저혈압인가? 아님 영양이 부족한 상태라서 그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식욕이 없어서 밥을 잘 안 먹던 시기였다.

 

그다음 증상이 나타난 것은 심한 과음으로 불금을 보내고, 토요일과 일요일엔 숙취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에서 월요일 아침에 출근을 할 때였다. 동료랑 함께 신분당선을 타고 가던 중이었는데 전조 증상이 느껴지더니 도저히 열차 안에선 버티지 못할 것 같아서 일단 내린 다음 승강장 벤치에 앉아서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 2019년 여름이었다.

 

그 뒤로도 두 번 정도 같은 경험이 있었다. 과음 후 공복 상태로 아침에 지하철을 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상한 건 가장 최근에 겪었을 땐 음주의 영향이라기엔 이미 술 마신 지 며칠이 지난 후였고 지하철을 타기 전부터 뭔가 느낌이 쌔했다는 거였는데... 어쨌거나 증상과 상황으로 미루어 추측하건대 저혈당증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전조 증상이 있을 때 빠르게 승강장의 자판기에서 당분이 들어 있는 이온음료를 뽑아 마셨다. 그럼 좀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또 어디에서 읽은 내용엔, 갑자기 쇼크가 와서 쓰러지면 뇌진탕의 위험이 있으니 전조 증상이 있을 때 일단 머리를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했다. 가능하면 누우라고 했는데, 지하철 바닥에서 냅다 그러지는 못하겠고... 일단 가능한 빨리 승강장에서 내려서 의자에 앉아 상태가 호전되길 기다렸다. 열차에서 내려서 어디에 앉는 것만 해도 훨씬 상태가 좋아졌다.

 

오늘 중요한 발표가 있어 출근하는 길이었는데, '배가 고픈 건가...?'하는 느낌이 점점 심해지더니 허기가 감당이 안 될 정도가 되었고 갑자기 그 허기가 메슥거림으로 바뀌었다. 아 그거다. 그때 그 느낌이다. 마침 딱 그때 환승역인 강남역에 도착했다. 문 앞에 바로 의자가 있었다. 의자로 가서 쓰러지듯이 주저 앉았다. 식은땀이 너무 많이 나서 외투를 벗었다. 의자 바로 옆에 자판기가 있어서 이온음료나 뭐라도 하나 얼른 마셔야지 했는데 벗어둔 외투에서 지갑을 꺼낼 힘이 없었다. 에어팟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도 버겁게 느껴져서 에어팟을 귀에서 뺐다. 다음 열차가 올 때쯤까지 늘어져서 벽에 머리를 대고 있다가, 겨우 일어나 (이온음료가 없어서) 갈아만든 배 하나를 뽑아서 마셨다.

 

지난번과는 다르게 오늘은 며칠간 밥도 든든하게 잘 먹은 상태였고 (심지어 어제 저녁 치킨 먹음), 최근에 과하게 음주한 적도 없었다. 특이사항이 있다면 오늘 아침에 샤워하는데 갑자기 코피를 쏟았다는 것과 생리 중이었다는 것?

 

검색을 더 해보니 '미주 신경성 실신'의 증상과 일치한다. 갑자기 눈앞이 아찔함, 어지러움, 속이 울렁거림, 식은땀, 피부가 창백해짐... 사람들이 경험 공유하는 거 보면 지하철에서 이런 증상을 겪었다는 사람이 많다. 여기에서 조금만 더 버티고 서 있으면 그대로 기절했다가 바닥에서 눈 뜨며 깨어난다고들 한다.

 

납득이 되는 설명은 이거였다. 서 있으면 다리 쪽으로 피가 쏠리니 심장이나 뇌로 가야 하는 혈류량이 감소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교감신경이 활성화되는데, 이후 다시 정상 수치로 돌려주기 위해 부교감 신경이 활성화된다고 한다. 미주 신경은 부교감 신경에 속하고. 근데 이 작용이 비정상적으로 급격하게 일어나면 실신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배가 아픈 것도 마찬가지로, 부교감 신경이 항진되면 장 운동이 활발해지기 때문. 미주 신경성 실신은 원인도 모르고 약도 없어서 그냥 조심하는 수밖에 없단다. 의외로 흔한 병이라고 해서 놀랐다.

 

실신까진 가지 않아서 다행인데.. 이러다 진짜 어디서 갑자기 픽 쓰러지면 어떡하나 걱정이 된다. 너어어무 뭘 안 먹거나 과음하거나 그러지만 않으면 되지 하고 살아왔는데 오늘의 케이스 때문에 이젠 언제 증상이 나타날지 예상할 수가 없게 되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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