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연말회고

2024. 12. 31. 23:04데일리로그/회고

DAY-OFF의 '연말정산' 질문에 답을 하며 한 해를 마무리했다. 같은 맥락에서 답변한 질문을 모아 재구성해서 연말회고를 써본다. 아래 글에 나오는 번호와 볼드체는 '연말정산'에 나오는 질문이다.

 

동지 섣달에 대추차 마시며 연말정산을 했다.

 

 

 


일하는 마음

 

 

49. 올해 스스로가 낯설었던 순간은 일에 관해 입을 열기만 하면 눈물부터 났을 때다. 작년부터 이어진 '일하기 싫음'이 정점을 찍었고,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힘들었다. 항상 잠이 쏟아졌다. 아마도 회피성 수면욕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80. '나 왜 이렇게 게으르지' 하는 생각을 하며 스트레스를 받았다. '자처해서' 게으름을 피우면서 그 사실로 고통스러워하다니 사람이 이렇게 역설적일 수가 있나.

 

88. 생각이 많아질 때면 일기를 썼다.

 

"{project}은 너무 너무 스트레스다. 목요일 회의를 할 때마다 숨이 막힌다. (...) 일을 하기 싫으니까 막 졸리다." / Jan 4

"피곤이 가시질 않아 점심 먹고 집에 와서도 괜히 상한 머리 다듬으며 일 안 하고 도망 다니다 (...)" / Jan 5

"너무 춥고 피곤해서 도저히 일을 시작할 수 없었다. 사실 그보다는 그냥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 Jan 15

"어제는 일을 전혀 하지 않고 미친듯이 잠을 잤다. 꿈에서는 정반대로 일이 너무 많아 야근을 하는 내가 나왔다. 일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아서, 해야 할 일은 계속 쌓이기만 하는 상태다. 출근이 악몽이다. 그저 도망가고 싶은 마음뿐이다." / Feb 17

"누군가에겐 어떤 일을 할 수 없는,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냥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게 있구나" / Mar 30

"왜 일 얘기만 하면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 / Apr 4

 

어떤 문제든 시간이 흐르게 두면 언젠가는 해결이 된다고 믿었고, 지금까지 그 믿음은 배반당한 적이 없었다. 이따금 마음을 괴롭히는 일이 찾아와도 늘 침착하게 기다렸고 잘 넘겼다. 하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나는 수렁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내가 게으름이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다른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76. 내 몸과 마음을 돌보기 위해 처음으로 심리상담을 받았다. 47. 상담을 받으며 이야기를 하다가 펑펑 울었다.

 

환경이 바뀌면 내가 체면을 위해서라도 일을 다시 좀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조직 이동도 고려하고 있었는데, 상담 선생님은 성취감이 필요한 지금 시점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쌓아야 하는 환경으로 가는 게 최선의 선택은 아닐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내가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길 기다려주고, 여전히 나의 능력을 신뢰하는 팀장님과의 라포에도 큰 가치를 부여하셨다.

 

하루 일을 쉬고(샷다 내리고!) 그간의 일터를 되돌아보자는 의미의 '정전데이'를 기획해서 팀원들과 콧바람도 쐬고 1분기 회고도 했다. 5점 만점에 1점짜리 상태로 일을 하고 있었다는 나의 고백에 팀원들이 놀랐지만, 적극적으로 꾸준하게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다른 팀원들의 현 상태도 뜻밖이었다. 다들 힘이 빠져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을 속상해하고 있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사실, 66. 실은 모두가 외롭고 힘들고 무기력해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게 위로가 됐다.

 

팀장님께 업무 분장을 요청해서 오랫동안 해오던 프로젝트에서 손을 뗐다. 그 프로젝트가 수렁의 핵심이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새로 맡은 프로젝트에는 전보다 훨씬 잦은 빈도의 규칙적인 마감이 있었다. 적당한 분량의 업무와 적당한 책임감. 이 일을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 주기적으로 맛보는 '해냈다'는 성취감. 드디어 '불능'의 상태에서 구제된 것 같았다.

 

83. 올여름 오피스 근무로 버텼다. 재택 근무를 하다가 피서 겸 오피스 근무로 바꾸었는데, 회사에 내 자리가 없는 것도 괜히 아쉬웠고, 출근자들끼리 유대가 쌓이는 것도 부러웠기 때문이다. 또 아침에 꼭 샤워를 해야 한다는 점도 있다. 52. '샤워하기'는 작지만 확실한 나만의 기분전환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업무 시작 시간 직전에 가까스로 일어나 고양이 세수로 눈곱만 떼고 노트북을 켤 땐 일하러 끌려 나온 기분이었는데, 일단 샤워부터 하면 다운되어 있던 기분이 한결 개운해진다. 체면상으로도, 의지적으로도 밖에 나갈 수 있어진다. 그냥 재택 근무 하기 전에 샤워하면 되지 않느냐고? 남이 보지 않을 때에도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라는 말을 퇴계 이황이 괜히 한 게 아니다. 남 볼 일 없는데 수신(修身)하는 건 선비다 선비. 아무튼 샤워하고 회사 나가서 일하다가 팀원들이랑 점심/저녁 먹고 스몰토크도 하면서 조금씩 활기와 동력을 찾아갔다.

 

12월 들어 다시 조금 퍼지는 듯하다. 내가 겨울을 타나? 지금은 무기력하진 않지만, 계속 해오던 대로만 일하면 되는 지금의 상태가 괜찮나 조바심이 든다. 안주하고 있는 게 찜찜하달까. 윤주와 함께 "그놈의 성장 타령, 제발 그만!!!" 외치고 온 게 얼마나 됐다고.

 

 

 


오만과 편견

 

 

29. 올해 깨진 나의 편견은 '어떤 문제에 대해 나는 도덕적으로 옳은 선택을 했기 때문에, 남을 비난할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남을 비난할 자격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도덕'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은 없을지언정, 공동체가 합의한 도덕 원칙에 입각해 어떤 선택이 옳냐 그르냐를 판단할 수 있다고도 여긴다. 천명하건대 나는 96. 모두가 선을 넘은 행동에 대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은 자신의 신념을 바탕으로 소신껏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여전하다. 그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별개이고, 따져야 한다고 믿는다. 문제는 '그렇다면 그 밖의 문제에 대해서도 나는 도덕적으로 옳은 선택을 하는가?'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나는 엄격한 잣대를 가지고 있지만, 그 밖의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니와 그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그의 잣대를 들이밀 때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생각했더라는 걸 알게 됐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는 '펫샵 소비 지양'이었는데, 이 문제에 심드렁한 사람들에게 실망했던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데 한편으론 또 초콜릿 같은..." 하고 친구가 운을 띄우자마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동 노동, 노동 착취의 문제가 만연한 카카오 농장의 이야기를 들어본 바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좋아하는 초콜릿을 사 먹으면서 언제 한번이라도 이 소비에 연결되어 있는 존재를 의식한 적이 있었던가. 그러한 초콜릿 같은 '그 밖의 문제'는 얼마나 광범위한가.

 

그리하여 80. 틀린 걸 선택한 사람을 함부로 비웃지 않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도덕적인 문제를 끌어안고 고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군가를 비난할 때, 나 또한 도덕적으로 무결한 인간일 수는 없음을 망각하지 말자. 75. 나는 편협 ZERO 인간이 되고 싶다.

 

 

 


55. 올해 밑줄 친 문장들

 

 

나는 둘째 이모가 당황하거나 거짓말을 할 때 짓는 표정을 안다. 그때의 말투라든지. 정말 잘됐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사이의 사람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나한테 안 들켰으면 좋겠다.

🔗 2023년 결산_일기(1-6월) | yellowtear

 

채은정/ 그럼 상대방의 문제가 보여도 가만히 있어요?
박미선/ 그게 나한테 문제인 거지, 그 사람한텐 문제가 아닐 수도 있거든. 예를 들어 방을 안 치워, 너무 지저분해. 미칠 것 같잖아요. 근데 나름의 질서가 있는 거거든, 그 사람한텐.

 

🔗 https://youtu.be/Ev8eoAtKccA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이기만을 바라는 것.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내게는 문제적인 모습을 보이지(들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은 그저 나의 이기심은 아닐까. 도리어 나의 편협함을 발견하는 것일지도.

 

 

남편은 케이크를 만들어왔다. 초콜릿 케이크였고, 위에 '축 사랑'이라고 써 있었다.
 "내가 축 생신, 축 결혼, 축 회갑은 봤어도 축 사랑은 처음 보네."
순임이 웃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도 나를 사랑하니까 그걸 축하하는 거지."
남편도 웃었다.

- 장강명, ⟪산 자들⟫, 143-144쪽.

 

 

피나 시체처럼 보기 힘든 것들에는 시청에 주의를 요한다고 경고하고 희미하게 보여주는데 시인들의 시에는 모자이크 하나 없다.
(...)
시인은 술도 밥도 그냥 먹지 않고 비도 허투루 맞지 않는다. 시인은 사람들이 피하는 눈과 비와 해풍도 동해 오징어처럼 처절하게 얼리고 녹이고 말리는 데 쓴다. 글씨 쓸 줄 알면 글도 써지는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글로 시를 쓴다는 것은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검은색을 설명하는 일. 검은색도 빛을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의 표현이고 검은색은 반사해 낼 빛도 없는데 시인은 설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눈 감은 채로 밤새 설명하고 또 설명한다.
그래도 설명이 안 되면 시인은 제일 크게 운다. 그 눈물에 눈이 멀 정도로.

- 문상훈,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 72쪽.

 

 

표현에 서툰 사람이 가져온 큰 마음을 비웃으면서 저기 있는 내 마음 보이냐고 맨손으로 허둥지둥 설명하는 모습이다.
(...)
네가 밉다고 할 때는 다섯을, 사랑한다고 할 때는 열을 세고 말하기로 한다. 말이 앞서고 글이 앞서서 솔직하지 못했다는 말을 자주하기로 한다. 상대의 표현이 서툰 것을 보고 마음이 작다고 여기지 않는 사려가 있으면 좋겠다.

- 문상훈, 내가 한 말을 내가 오해하지 않기로 함, 122-123쪽.

 

 

 "There are all kinds of courage,"
 said Dumbledore, smiling.
 "It takes a great deal of bravery to stand up our enemies, but just as much to stand up to our friends."

- J.K. Rowling, Harry Potter and the Sorcerer's Stone

 

친구에게 맞설 용기

 

 

A few seemed mildly interersted in what she had to say, but were reluctant to take a more active role in campaigning. Many regarded the whole thing as a joke.

- J.K. Rowling, Harry Potter and the Goblet of Fire

 

본인의 편의가 집요정의 착취에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분노하고 부끄러워하며, 집요정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행동을 곧바로 실천으로 옮기는 헤르미온느. (장관감이다 진짜.) 그리고 그걸 우스개 취급하는 사람들. "Many regarded the whole thing as a joke."라는 말이 마음을 푹 찔렀다. 누군가에겐 삶의 문제인 것을, 누군가는 분노하는 문제인 것을, 또 다른 누군가는 비웃어 넘긴다는 것이.

 

 

There is nothing to be feared from a body, Harry, any more than there is anything to be feared from the darkness. Load Voldemort, who of course secretly fears both, disagrees. But once again he reveals his own lack of wisdom. It is the unknown we fear when we look upon death and darkness, nothing more.

- J.K. Rowling, Harry Potter and Half-Blood Prince

 

"우리가 죽음과 어둠을 바라볼 때 두려워하는 것은 미지의 세계라는 것, 그뿐이란다."

 

 

 


톺아보기

 

 

JAN 거의 10년만에 스노우보드 / 스쿼트 107kg / USAPL -52kg 은메달 FEB 장기, 안구, 조직 기증 서약 / 추억의 약과 파는 곳 찾음 MAR 영진 결혼식 / 남한산성 / 설국 평창 여행 APR 원주에서 벚꽃 즐기기 / 무척 거대하고 압도적으로 아름다웠던 목련나무 / 제근 생일파티 / 레이저태그 MAY 오랜만에 만난 인선 / 퓨리오사 / 위험을 무릅쓰고 사랑니 발치 JUN 에브리씽 페스티벌 / 하지 미드소마 상영회 / 오랜만에 만난 보라 / USAPL -52kg 은메달 / 데드리프트 120kg JUL 횡성 계곡 물놀이 / 서퍼스 안동 여행 but too hot / 문화역서울 사운드웰요가 / 오픈새러데이 가족 초청 AUG 아빠 환갑 기념 풀빌라 펜션 / 두 번째 코로나 감염 / 첫 서프보드 개시 SEP 춘천 워케이션 / 파크콘서트 카더가든 & 장기하 / 개미와 비긴어게인 OCT 벤치 프레스 55kg / 대회 준비하다 허리 삐끗 / USAPL -52kg 금메달 / 빈이랑 금진수련회 NOV 거의 10년만에 에버랜드 / 반계리 은행나무 / 생애 첫 차박 / 린 오빠 가족 회동 DEC 계엄이요? / 영진 신혼부부 집들이 / 마늘 듬뿍 토마토 닭도리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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