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숲에서 커리어 고민하는 젊은 날의 초상

2021. 12. 2. 18:23데일리로그/일하는 사람의 자아


디사커 친구들을 만난다 = 높은 확률로 서울에서 본다 =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시간이 길다 = 팟캐스트를 듣는다.
이번에 고른 건 '빅 리틀 라이프 | EP09 꼬리에 꼬리를 무는 커리어 고민'이었다.

"커리어 고민은 없어?"
장도수 PD가 말하길, 이게 거의 마법의 질문이라고. 대기업에 다니는 한 친구에게 커리어 고민을 묻고, 그가 말하는 '커리어 고민이 없을 것 같은 직업/직장/직군'에 있는 사람에게 다음 전화를 걸어 같은 질문을 건네는 식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전화 인터뷰가 이어진다.

대기업 개미1 / 스타트업 개미2 / 컨설턴트 개미3 / 공무원 개미4 / 변호사 개미5 / 초등교사 개미6 / 공대나온 개미7 / 개발자 개미8 / 개발자 개미9 / 개발자 개미10 / 정년보장 개미11 / 프리랜서 개미12 / CEO 개미(?)13


대기업의 제너럴리스트 관리자와 스타트업의 스페셜리스트 에디터 모두 본인의 전문성 없음을 아쉬워하며 컨설팅 회사에 다니는 커리어 짱짱 컨설턴트를 지목한다. 컨설턴트 개미 3은 끊임없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해야 하는 업계에 피로를 느끼며, 보장된 직장에서 자아실현을 도모할 수 있는 공무원을 부러워한다. 공무원은 어차피 이렇게 갈리는 거 똑같을 거면 전문직이 낫겠다고 말하고, 전문직인 변호사는 연차가 쌓이는 만큼 계속해서 전문성을 고민해야 한다는 점을 호소한다. 커리어 고민이 없을 것 같은 직종으로 지목된 다음 타자는 학교 선생님. 그렇게 커리어 고민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을 찾아 전화는 이어지지만, (예상 가능하듯이) 모두가 나름의 커리어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개발자라는 같은 직군 안에서도 서로가 서로의 기술 특성을 탐낸다. 특수한 기술을 하는 사람은 웹/앱 개발과 같은 범용적인 기술을 다루는 사람들이 기회가 많다며 부러워하고, 그 사람들은 또 시장이 크고 수요가 많은 만큼 공급도 많아서 본인의 전문성을 높이기 쉽지 않다며 아쉬워한다. 그들 모두 지속적인 성장을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떠나고 싶어 하기도 한다. 유지보수만 하다가 고인물 될 걱정을 하면서.

지난 몇 달간 현 조직의 노동 강도를 두고 볼멘소리를 해왔고, 번아웃을 겪는 와중에 또 다음 배포를 향해 달리는 일을 반복해왔다. 누구나 가슴에 사직서 한 장쯤은 품고 다닌다고들 하는 것처럼 나도 퇴사가 고플 때마다 링크드인 프로필을 업데이트하며 탈출각을 재보곤 했다. 꿈 그래프에 'Google에서 개발자로 일하기'를 써넣은 것도, 실은 Google이라는 회사에서 일할 때의 워라밸이 탐났던 거였으니 현 상태에 대한 거부감의 발로가 아니었나 싶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일하다 퇴사를 하고 창업을 했다(던가 유망한 스타트업에 들어갔다던가 하)는 지인 이야기를 윤주가 해줬다. 마소, 애플, 구글 같은 글로벌하고 거대한 IT 기업에 입사한 사람들도 퇴사각을 잰다고. 그 기업들은 이미 웬만한 건 다 해본 상태이기 때문에, 진짜 새롭고 신박한 걸 만드는 팀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대다수의 직원들은 유지보수가 주 업무라고.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API 복사기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Chrome에선 개발자 도구에 개발자 50명이 붙어서 일한다는데, 우린 모든 직군 다 합쳐 50명인 조직에서 Chrome 전체에 준하는 걸 만들고 있다'는 게 나의 툴툴 레퍼토리였는데, 그 말을 뒤집어 생각해보게 됐다. Chrome에서 일한다면 내가 맡는 일은 개발자 도구의 1/50 만큼의 사이즈라는 거지. '내 것'을 만들고 싶어서 회사를 떠난다는 마소, 애플, 구글의 개발자들이 좀 이해되는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일을 하든 커리어 고민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면, 이 난국을 타개할 답이 퇴사는 아닌 것 같다. 도전 과제가 없으면 우울해지는 게 또 나 같은 사람 종특이라서, 새로운 프로젝트가 (너무) 많은 지금의 환경이 오히려 일에 질리지 않고 규칙적으로 환기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긴 하다. 또 요즘 시장에서 핫한 기술로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이 조직에서 오래 일해도 고인물 되는 건 쉽지 않을 것 같다. 퇴사병 처방은 이것으로 된 것 같고, 좀 더 연차가 쌓이면 그땐 이직이 아니라 창업 계획을 품고 살지 않을까?

2021. 11.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