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일기

2021. 8. 21. 21:39데일리로그/일하는 사람의 자아

『마감일기』, 88-89쪽

 

'작업 일정 8/10 ~ 13일 예정 17~20일'

 

지난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예정해둔 작업이 있었는데, 갑자기 생긴 긴급 이슈에 대응하느라 그 일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20일까지 마치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금요일 퇴근 전 주간보고를 작성하면서 기존 일정에 취소선을 긋고 돌아오는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날짜를 옆에 다시 적었다. 하지만 17일, 출근과 동시에 터진 문제에 대응하느라 일을 또 하루 미루게 되었다. 수요일 아침 회의에서 팀장님이 작업 현황을 물었다.

 

"스토어 어떻게 되어가요?"
"이제 시작하려고요. 금요일까지 작업 마무리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제 시작하는데 금요일에 끝낼 수 있어요?"
"네. 가능해요."

 

하지만 "X일까지 가능합니다!"라고 호언장담을 했다가 마감이 다가오면 며칠 밤을 새우고, 그러고도 완성을 채 못해서 QA팀에 양해를 구하고 마감일을 하루 이틀 더 미루었던 적이 여러 차례 있었던 바, 그런 내가 고작 3일 만에 작업을 끝내겠다고 또 자신 있게 말하고 있으니 팀장님은 영 못 미더우셨나 보다. 회의가 끝나고 팀장님이 따로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 주 개발 괜찮은 거 맞아요? 릴리즈 일정 잡으려고요."
"네, 제가 판단하기로는 기존 틀 재활용하는 게 많아서 이번 주 개발 가능하다고 봤어요."
"막 밤새우고 그래야 하면 더 늦춰도 돼요."
"아뇨 그 정도는 아니에요. 3일 다 쓰면 가능할 것 같아요."

 

애초에 잡아둔 4일 중 하루는 스페어였다. 3일은 작업 예상일, 나머지 하루는 리뷰를 기다리고, 올라온 코멘트가 있으면 반영하고,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견되면 수정하기 위해서 추가로 벌어두는 시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자동차에 스페어타이어를 하나 더 싣고 다니는 것처럼, 작업 일정도 실제 작업 예상일에 스페어를 붙여서 계산하는 것이다.

 

일정 산정은 늘 어렵다. 자기 객관화는 안 되는데 욕심과 포부는 넘치는 신입 시절, 늘 마감을 지키겠다고 밤을 새우느라 고생을 했다. 새로운 일을 할당받는 상황에서 "할 수 있어요?"는 질문을 받으면, 내가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은 "할 수 있다." 혹은 "할 수 없다."의 두 가지뿐인 줄 알았다. 아니, 애초에 "할 수 없다"라고 답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다. 도리상 묻는 질문이고, 내가 해야 하는 답변의 기본값은 "YES"다. 그다음 내놓아야 하는 건 마감일이다. 언제까지 일을 마치겠다는 약속. 출시일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면 내가 할 작업의 마감일은 내가 계산해서 내놓아야 한다.

 

내 능력치에 대한 데이터가 없는 상황에서 일정을 산정한다는 건 막막하기도 위험하기도 한 일이다. 더 큰 문제는 스스로 그걸 막막하다거나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애초에 신입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주어진 것이기도 하겠지만, 그 당시 내 눈엔 좀 어려워는 보여도 아예 손도 못 댈 것 같은 일은 없었다. '열쩡! 열쩡! 열쩡!'만 있으면 어떻게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냉큼 "할 수 있습니다!"하고 느낌표까지 붙여가며 답을 했다. '좀 어려워는 보'이는 것에서 이미 수많은 난관이 예상되는 건 뻔한 일인데도 그 뻔한 걸 몰랐다. 순전히 감으로만 일정을 잡았다. '만들어야 하는 게 뭐, 뭐, 뭐니까 대충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하지만 막상 작업을 시작하면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점점 버거워졌다. 시간은 항상 모자랐고, 마음은 늘 급했다.

 

여러 번 죄인이 되고 나서야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계산하는 일정은 항상 빠듯하니 반드시 그 일정에 비례하는 만큼의 여유 시간을 스페어로 붙이고, 기획안을 꼼꼼히 확인해서 협업이 필요한 부분은 사전에 담당자에게 공유해놓는다. 스펙은 단계별로 구분해서 꼭 되어야 하는 것과 여차하면 다음 배포로 넘길 것을 나누어두고, 작업을 하다가 안 되겠다 싶으면 기획자와 협상을 한다. 처음부터 "할 수 없다"는 카드도 꺼내야 할 때는 꺼낸다. '마감을 앞둔 일이 있어서 리소스가 없다'는 이유가 있을 때는 단호하게 일을 받지 않을 수 있다. 상황은 조금 달라도 대사는 책의 구절과 똑같다. "죄송합니다만 마감이 있어서요. 마감만 아니면 어떻게 해보겠습니다만 곧 마감이거든요." 이 모든 게 엄두가 안 나면 팀장님께 SOS를 친다.

 

수요일도, 목요일도 무리하지 않고 늘 퇴근하던 시간에 퇴근을 했다. 금요일 6시쯤 모든 작업을 마무리하고 개발망과 스테이징에도 올려서 테스트까지 마쳤다. 3일간의 10 to 7을 다 써서 딱 맞춰 끝냈다. 처음이었다. 마감일에 이렇게 마음이 여유롭다니. 당당하게 작업 마무리했다고 말할 수 있다니! 일한 만큼의 짬이 차긴 찬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