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의 줌터디 : 개발자 친구들과의 온라인 독서 모임

2020. 12. 24. 23:11데일리로그/일하는 사람의 자아

당신의 개발 안녕하신가요? 혹시 생각 없이 하루하루 주어진 코딩만을 반복하는, Code Monkey가 되어가고 있지는 않나요. 저 역시 스스로 코드 몽키가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 요새 잠을 도통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을 타파하고 더 나은 개발자, 데이터 분석가 등이 되기 위하여, 개발 관련 독서 소모임, 가칭 'OO아, 책읽자'를 소소하게 시작하려 합니다.

소소함을 강조한 만큼, 생업에 절대 지장이 가지 않는 선에서, 강제성 전혀 없이 가볍게 진행하고자 합니다. (...) 언제든지 참여하고 탈주할 수 있으며, 일에 치이는 달, 혹은 이미 읽었던 책이 선정된 달은 잠시 쉬어가셔도 좋습니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대화방에만 들어와 계셔도 좋습니다.

 

유쾌한 친구가 독서 소모임을 만들었다며 꽤나 장문의 모집글을 동아리 단톡방에 올렸다. 그 어떠한 강제성도 없는 아주 '소소'한 독서 모임이라고 했다. 모임 가칭에서 호명하는 'OO'은 그 단톡방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한 친구의 이름이었다. 심지어 이름 주인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개발자 최대 난제는 네이밍이라고 누가 그랬나? 글이 올라오자마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가 연달아 터졌다.

 

기술 서적을 혼자 읽는다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친구가 모집글에 쓴 것처럼 일에 치이는 시기가 많고, 또 당장의 참고해야 하는 자료가 아니라면 더더욱 책에 손이 가지 않는다. 기술 서적은 소설처럼 쭉쭉 빠르게 읽어내려갈 수 있는 종류의 책이 아니다. 무미건조한 내용에다 심지어 대부분 번역서다. 번역투가 섞이면 글맛이 죽어서 더 재미가 없어진다. 분야의 특성상 한국어로 번역된 기술 용어가 영어로 된 원래의 단어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도 많다.

 

사실 연초에 호기롭게 'HTTP 완벽가이드'라는 책을 샀다. 700쪽이 넘는 아주 두꺼운 책이다. 웹 개발자 필독서라기에 새해 버프로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2020년이 일주일 남은 지금까지 단 1쪽도 읽지 못했다. 배포가 코앞이라 일에 치일 때는 책을 펴볼 여유가 없고, 배포가 지나고 일정이 여유로울 땐 일단 좀 쉬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퇴근 시간까지 코드랑 씨름을 하다 보니 저녁을 먹고 나면 코드가 아닌 걸 보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야근 시즌과 칼퇴 시즌을 몇 번 겪다 보니 일 년이 훌쩍 흘러가버렸다. '이렇게 한 것도 없이 경력 1년을 채웠다고?' 하는 생각이 들자 당황스러웠다. 작년에는 '인턴 → 신입'이라는 크나큰 신분 상승이 있었고, '첫-'이라는 접두어가 붙는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배우고 있다',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면서 보냈다. 그런데 올해엔 출근과 퇴근 밖에 한 게 없는데 금세 내가 2년 차라는 거다. 내가 2년 차라니? 공부를 안 해도 연차는 쌓인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두려워졌다. 당연히 이번 해에도 일을 하면서 배운 것이 아주 많지만, 대학생 때처럼 강의가 없는 시간을 모두 털어 공부를 하는 건 아니었으니 그 차이가 괜히 게으름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친구들의 작은 의지를 십시일반 모으면 매달 한 권의 기술 서적은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느새 한 달이 흘러 12월.
"완독했습니까"
"아뇨 부끄럽습니다"
9명의 사람들 중에 책을 완독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도 책은 구해놓고 펴보지도 못했다.

그래서 우린 온라인 독서실, 일명 줌터디를 열기로 했다.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 온라인 독서실 영업시간을 미리 공유하면 원하는 사람은 들어와서 조용히 책을 읽다가 자유롭게 나가는 거다.

 

 

지금까지 여섯 번, 온라인 독서실이 열렸다. 네 번은 줌(Zoom)으로, 두 번은 구글 미트(Google Meet)로 모였다. 오늘 책 읽을 거라고 줌 켜겠다고 하면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최소 두 명 이상은 있었다. 야근을 해야 하는 날에도 저녁을 먹고 나면 텐션이 떨어져서 다시 까만 화면을 보기가 싫어지는데, 그래도 약속을 잡아두니 늦어도 그 시간엔 일을 재개할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도 꼭 들어와서 책을 읽기만 하는 건 아니고, 시험공부를 하거나 코딩을 하다가 나가기도 했다. 독서실 운영 시간을 공지할 때는 늘 한 시간이라고 이야기했는데 막상 열고 나면 두세 시간은 너끈히 넘기곤 했다.

 

줌은 호스트가 일일이 입장을 허락해 줄 필요 없이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는 옵션이 있다. 처음에는 이 옵션의 존재를 몰라서 호스트가 입장 신청 알림을 볼 때까지 하염없이 대기실에 기다려야 했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기다린 사람 같지만 사실 여섯 번 모두 내가 호스트였다. 책을 읽다가 "나 입장 허락해줘"라고 오는 카톡 메시지를 보고서야 사람들을 들여보내 주었다. 대기실 on/off 옵션이 있다는 점은 참 좋은데, 줌은 전용 소프트웨어를 설치해야만 회의에 참여할 수 있다는 진입장벽이 있다. 구글 미트는 온라인 서비스이기 때문에 브라우저가 있기만 하면 참여할 수 있다. 아, 물론 구글 서비스기 때문에 구글 계정은 필요하다. 대신 무조건 호스트가 허락을 해주어야만 입장이 가능하다.

 

이렇게 온라인 독서 모임이 굴러가고 있다고 멤버가 아닌 동아리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그 친구도 독서실 회원이 되었다! 대학생・직장인 개발자 독서 모임에 '대학원생'도 추가됐다. 가장 최근의 독서실은 저녁 여덟 시에 열렸는데 자정이 넘어 끝났다. 다섯 명이 조금씩 시간차를 두고 머무르다 나갔다.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고독한 시기에, 야근을 하더라도 각자 다른 이유로 고생하는 친구들 얼굴을 보고 있으니 조금은 덜 외롭고 조금은 더 힘이 난다.

 

아무튼 한 해를 정리하고 다음 해의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연말이다. 내년 목표에도 'HTTP 완벽 가이드 완독하기'는 추가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