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4. 11. 18:06ㆍ 데일리로그/식집사의 관찰 일기
혼자 살면서 집에서 가끔 음식을 해 먹는 1인 가구에 마트에서 파는 대파 한 단은 너무 많은 양이다. 부지런히 썰어 요리해 먹지 않으면 절반은 그냥 버리기도 일쑤다. 지난번 자취를 했을 때 대파를 집에서 수경재배 할 수 있다는 말을 어디서 주워듣고 잠깐 대파를 키운 적이 있다. 물에 담가두면 계속 잘라 먹어도 끊임없이 자란다. 그래서 한번 마트에서 대파를 사 온 뒤로는 대파를 버리니 얼리니 사니 하는 고민을 덜 수 있었다.
이번에도 마트에서 흙대파를 사 왔는데 아주 싱싱하고 튼실한 상태였다.
수경재배할 때는 우선 뿌리에 묻은 흙을 꼼꼼하게 씻어줘야 한다. 흙에 있는 박테리아 때문에 그대로 물에 담가두면 뿌리가 쉽게 썩을 수 있다. (이건 모든 식물에 해당한다) 대파를 수경재배하는 건 정말 쉽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냄새다. 물을 자주 갈아줘도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듯한 냄새가 난다. 이 냄새가 너무 싫어서 전에도 수경재배하다 말았다. 그래서 이번엔 수경재배 대신 화분에 심어두고 키우기로 했다. 대파를 심으려면 화분이 필요한데, 이렇게 굵고 긴 대파를 심을 만큼 큰 화분이 없어서 일주일 정도만 물에 담가 두었다.
회사에서 키우던 화초가 죽는 바람에 빈 화분이 몇 개 남아있었다. 코로나 때문에 재택근무로 전환되면서 회사에 한동안 가지 못했는데, 이제 정말 화초에 물을 줘야 할 때도 되고 해서 주말에 자전거를 타고 가 화초들을 모두 구출해왔다. 파는 적당히 썰어 뿌리 부분은 토분 두 개에 나눠 심고 자른 부분은 냉동실에 얼려두었다.
한 화분의 대파들은 심고 나서 조금 자랐다 싶을 때, 밀푀유나베 국물을 내는 데 쓰기 위해 또 한 번 더 뎅강 잘랐다. 뒤쪽 화분이 밀푀유나베용으로 잘린 파들이다. 잘라 먹고 고작 하루 지났을 뿐인데도 저만큼이나 자랐다. 잠깐 한눈팔다 봐도 고새 아~~주 조금 자라있는 게 보일 정도로 빠르게 자란다. 키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침에 작업실에 드는 햇볕이 너무 따뜻해서 온 화분을 다 가져다 책상에 올려두었다. 이사 선물로 화초를 선물해주신 JH 님께 소식도 전해드릴 겸, 재택근무의 근황도 전할 겸 이렇게 화초를 키우고 있다 사진을 찍어 팀 방에 올렸다. 팀원들이 "파에요??", "저게 뭐야 파? 대파를 심어놨네" 하며 대파에 주목했다. 팀원 DH 님이 자기도 지난주에 대파를 심었는데 꽃이 나서 바로 잘라버렸다고 했다. 신이 나서 대파 이야기를 한참 했다. 코로나 시대에 재택 근무하는 IT 회사 직원들이 대파 농사로 유대감 형성이라니 정말 엉뚱하고 웃기다. ㅋㅋㅋㅋㅋ
대파를 여러 번 자르다 보면 식물이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번식을 위해 꽃대를 올린다고 한다. 몇 번 잘라먹지도 않았는데 금방 꽃대가 올라와서 누차 잘라버렸다. 꽃대를 잘라야 잎이 억세지지 않고 꽃대로 영양이 모두 가버리는 것도 막을 수 있다고 해서였다. 그런데 이쯤 되니 대파꽃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해졌다. 혼자 살면서 잘라 먹을 대파는 여전히 많고, 기왕 튼튼한 대파에 꽃대가 올라왔으니 이건 두고 봐보자 싶어 그대로 두었다. 이 친구들이 꽃을 피우면 우리 집에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꽃이 된다. 대파꽃이라니!
하루는 스타벅스 쿠폰 만료일이 다가와 매장 오픈 시간에 맞춰 커피와 스콘을 사왔다. 6시 50분에 집을 나서서 7시에 커피를 사다니, 엄청나게 성실하고 부지런한 도시의 젊은 직장인이 된 것 같은 스스로의 모습에 흡족했다. 사실 맞지, 부지런했고 도시에 살고 직장인이기도 하니까. 아무튼 매장을 나서는데 커피 찌꺼기를 나눠주고 있길래 한 봉지 가져왔다. 쓸데가 많다.
습기가 많은 상태이기 때문에 그대로 쓰면 곰팡이가 쉽게 핀다. 신문지를 두 겹씩 겹쳐 햇빛이 잘 드는 작업실 한쪽에 깔아두고 커피 찌꺼기를 잘 펴줬다. 양이 꽤 많았다. 스타벅스에서 커피 찌꺼기 나눠주는 것 정말 좋은 아이디어다. 매장은 쓰레기를 줄이니 좋고 손님도 이렇게 많은 양의 원두 가루를 쉽게 구하니 좋고 버려질 것이 다시 쓸모를 찾으니 좋다.
일찍 일어난 날엔 햇볕에 커피 가루를 볶아주기도 했다. 뭉쳐있는 가루들을 꾹꾹 눌러 풀어줬다. 재즈를 틀어놓고 햇볕 드는 자리에 앉아 가루를 섞고 있으니 내 일상이 영화 리틀 포레스트 같아서 막 흐뭇했다.
이렇게 열심히 말린 커피 가루를 어디다 쓰느냐! 일단은 말리는 동안 커피향이 온 방안을 가득 채우기 때문에 이미 그 쓰임이 충분하다. 수분기 없이 마른 가루를 나눠 담아 냉장고나 화장실, 신발장에 두면 좋지 않은 냄새를 빨아들인다. 냄비나 후라이팬을 닦을 때 기름기 제거용으로도 좋다고 한다. 화분에 뿌려주면 물을 줄 때 가루의 성분이 씻겨 흙에 스며서 비료의 효과를 낼 수도 있단다. 화분마다 적당히 가루를 뿌려주었다. (냄새를 잡는다 하니 음식물 쓰레기 봉투에도 틈틈이 뿌려주면 좋을 것 같다!)
+보충... 화분에 뿌려둔 커피 가루 위로 물을 몇 번 부어주었더니 금방 곰팡이가 슬어버렸다. 흙에 가루를 바로 뿌리지 말고 차라리 물을 우려서 주는 게 나을 것 같다.
+보충2... 발효되지 않은 상태의 커피 가루를 식물에 바로 주면 가스가 발생하고 그 자체의 산도도 높아서 식물에 되려 해가 된단다. 발효하지 않은 상태의 가루를 식물에 사용하려면 커피가루와 흙을 1:9의 비율로 섞어 배양토로 쓰라고 한다.
며칠 전 어묵국을 끓여 먹는다고 또 대파를 크게 숭덩 잘랐다. 꽃대 올라온 화분 것은 두고, 다른 화분에 있던 것을 잘랐다. 정말 싱싱한 대파라서, 중간을 자르면 진액이 주르륵 흐른다. 원래도 얇은 대파를 골라심은 거였긴 하지만, 짧게 자른 데서 올라오는 새잎은 쪽파처럼 얍실하다*. 여기에서도 꽃대가 올라왔는데 이건 바로 잘랐다. 나 먹을 것도 있어야 하니까...
*'얍실하다'는 '얇다'의 경상도 방언이라고 한다. 방언일 것 같긴 했는데, 경상도 방언이라니 확실히 전라도 동쪽 방언은 경상도랑 겹치는 게 많다.
대파는 그늘진 곳에서도 크게 문제없이 자라고 다른 화초에 비해 물을 잘 먹는 편이라, 애정이 과해 과습으로 화초를 잘 죽이는 사람도 잘 키울 수 있는 식물인 것 같다. 또 식물을 키우면서 중간중간 수확하는 기쁨이 생각보다 무척 크기 때문에, 식용 식물을 키우는 건 정말 즐거운 일이다! 요즘처럼 집 안에 있는 시간이 긴 시기도 별로 없을 텐데, 이럴 때 가드닝으로 소소한 행복 챙겨보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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