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룸메 현 손님을 맞이하는 마음

2021. 1. 30. 21:24데일리로그

2021. 01. 22 ~ 24.

 

아빠는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사는 대학 동기들을 분기마다 한번씩 만나 점심을 같이 먹는다. 서로 결혼하는 것도,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도, 이윽고 그 애들이 장성해서 결혼하는 것까지도 지켜보며 여전히 돈독한 사이로 지내신다. 어렸을 땐 일 년에 고작 네 번 만나면서 그들이 어떻게 친한 친구로 지낼 수 있는지 궁금했다. 아빠가 그 모임을 시작했을 쯤의 나이가 되니 어떻게 고작 한 끼 식사를 하자고 매 분기마다 전국에서 친구들이 모일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아빠의 동기들은 돌아가면서 '유사'가 되어 자신의 지역에 친구들을 초대한다. 모임은 점심 식사에서 끝날 때도 있고, 근처 명승지 관람으로 이어질 때도 있고, 1박 2일 여행이 될 때도 있다. 엄마 아빠는 유사가 될 때마다 거의 항상 1박 2일 혹은 그 이상의 여행을 계획했다. 매 모임 비용은 상한선이 있었는데, 엄마 아빠가 기획하는 여수 여행에서는 예산이 늘 상한선을 넘었다. 그치만 모두가 여수는 예외로 쳤다. 여수는 점심만 먹고 돌아가가기에는 너무 아쉬운 곳이니까. 친구를 초대할 때마다 욕심을 더 부리게 되는 그런 모임이 30년쯤 이어지고 있다.

거기에 견줄만한 시간은 내게도 있다. 아빠와 내가 살아온 시간에 비례하면 나름 갖다대볼만한 십년지기 친구와의 시간. 본가를 떠나 기숙형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가족이 아닌 친구들과 식구로 지내는 생활이 시작됐다. 그때 록빈이를 처음 만났다. 네 명 룸메이트의 이름이 모두 한 자씩 겹쳐서 신기했는데, 그중에서도 록빈이는 나랑 글자가 겹친 친구였다. 여자 이름에 '록'자를 쓰는 게 흔하지 않은데 가운데 글자로 쓰는 건 더욱 드물어서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죽이 잘 맞아서 2학년 1학기에도, 3학년 때도 내내 같이 한 방을 썼다. 그러니까 록빈이랑은 대충 십년지기가 아니라 진짜 '십'년 지기다. '십일년지기'라는 말은 없고 '이십년지기'도 쳐주지 않으니까 지금 이 시점은 우리 둘 사이에 나름 기념할만하다.

록빈이랑도 어떻게 어떻게 하다보니 매년 얼굴 도장을 찍어왔다. 생뚱맞은 곳으로 여행을 같이 떠나기도, 서로의 집에서 재워주기도 하면서. 최근의 약속은 모두 록빈이가 서울에 올라온 경우였다. 잠깐 자취를 했을 때 빼고는 록빈이가 서울에 와도 재워줄 형편이 안 되어서 밥약만 잡았는데, 이제 명실상부 독립을 해서 집이 생기니 가슴을 땅땅 치며 언제든 오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지난여름 서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록빈이는 우리 집에서 3개월 동안 살다가 갔다. 객식구가 아니라 엄연한 룸메이트로 편하게 지냈으면 해서 아예 방 하나를 비워주고 세를 반반 부담했다. 이번 겨울에도 록빈이는 서울에서 실습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코로나 상황이 좋지 않아 실습을 재택으로 하게 되어 이번엔 그냥 손님으로 놀러 왔다. 그러니까 록빈이는 전전...n...전 룸메이자 전 룸메, 그리고 매년 최소 한 번은 꾸준히 보는 십년지기다.

 

마늘의 민족이 만든 감바스

집에서 근무를 하다가 중간에 잠깐 나가 후다닥 바게트, 새우, 마늘을 사 왔다. 퇴근 30분 전에 딱 맞춰 도착한 록빈이랑 휘리릭 뚝딱 감바스를 만들어 먹었다. 롯지팬 사서 가장 잘 쓴 날이 아닐까?

 

너무 익혀서 퍼져 버린 알리오올리오

마늘을 왕창 넣어 먹고 남은 감바스 오일에 편 마늘과 다진 마늘을 더 넣어서 알리오 올리오까지 만들었다.

 

미리 생일 축하를 한다고 록빈이가 조각 케이크도 사 왔다. 지난번 록빈이 생일 땐 같은 곳의 당근 케이크를 놓고 축하를 했는데 이번엔 초코 딸기 생크림 케이크다! 록빈이가 우리 집 냉장고에서 케이크를 꺼내와서 놀랐다. 감바스를 만들면서도 여러 차례 열었던 냉장고 문인데? 집에 들어오자마자 냉장고 안쪽에 케이크를 넣어뒀단다. 내가 필요한 것만 보고 주변에 신경을 잘 쓰지 않는 타입인 걸 아니까 서프라이즈를 하면서도 맨날 들킬 걱정 없이 뭘 한다 얘는.

 

미쳤다 진짜 ㅠㅠㅠㅠ 너무너무 좋아하는 이규태 @kokooma_ 작가님의 일러스트 달력을 록빈이가 선물로 챙겨 왔다. 새해에 주문한 건데, 우리 집으로 배송시킬 것을 자기 집 주소로 적어버렸다며 이번에 들고 온 선물이었다. kokooma 작가님 너무 좋아서 얼마 전에 색연필화 배우기 시작한 진선이한테도 소개해줬단 말임... 진짜 넋을 놓고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다 구경했다.

 

보라구... 색감 미쳤다구...

 

speechless... 🙊

 

명예의 전당 탈환

달력 봉투부터 이미 캔버스 역할 200%를 하고 있었다. 바닥에 세워둘까 하고 놓고선 멀찍이 바라보다가 헐 여기다 촉이 왔다.

 

초록초록

식물로 가득한 작업실에 딱 어울리는 그림! 정말 찰떡이다 💚

 

진짜 달력은 침실 벽에 걸었다. 온몸으로 매달려 꼭꼬핀을 박고 달력 걸고 감탄 👏👏👏

 

토요일 브런치는 마늘볶음밥 + 계란후라이 + 베이컨

다음 날 점심엔 어제 알리오 올리오 만들면서 바싹 익힌 마늘 남은 걸로 록빈이가 마늘 볶음밥을 만들어줬다. 저기 가운데에 있는 나무 쟁반도 록빈이가 선물로 준 거다! 이제 차 마실 때마다 트레이로 쓰면 딱 좋을 거 같다.

 

수플레 팬케이크 재료

시간을 달려서 어느새 일요일 브런치 ㅎㅎㅎ 생각보다 재료는 아주 간단한 수플레 팬케이크! 휘핑 치는 게 제일 번거로운 일인데 이제 핸드블렌더 있어서 별 거 아니다. 끝에 거품기를 끼우면 휘핑기로 쓸 수 있다. 그냥 팬케이크도 아니고 '수플레' 팬케이크라고 하니까 록빈이가 엄청 신나 했다.

 

록빈이가 슉슉 휘핑 치고 내가 반죽하고 구워서 금방 완성~~! 록빈이 것도 내 것도 같은 온도로 따뜻했으면 좋겠어서, 절반 먼저 만들어서 빼두고 나머지 절반 구우면서 덮어줬다.

시럽은 직접 만들어서 쓰자고 설탕이랑 물이랑 넣고 끓였다. 근데... ㅋㅋㅋㅋㅋㅋ 아니 왜 달고나가 되죠 

 

시나몬 가루를 뿌린 바나나와 수플레 팬케이크

항공샷으로는 티가 잘 안 나지만 사실 시럽인 척하는 달고나 조형물... 사실 뿌린 것도 아니고 엿가락처럼 늘여서 얹은 거다. ㅋㅋㅋㅋ

이거 먹자마자 록빈이는 짐 싸서 내려갔다. 🥺 한 달의 체류를 예상하고 있다가 갑자기 2박 3일, 그것도 사실상 다 합치면 만 하루 정도의 시간밖에 같이 있지 않아서 록빈이 보내는 게 너무 아쉬웠다. 일 때문에 바쁘고 생활비가 빠듯한 때에도 친구들만큼은 욕심을 부려서라도 접대를 하던 엄빠 마음을 닮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