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겨울, 혼자 걸었던 길고 긴 사려니숲길

2016. 12. 31. 23:44국내여행/2016 제주

2016. 12. 06.


12월 3일, 이번 해 벌써 세 번째 제주에 왔다. 저번 두 번은 여행이었지만, 이번 방문의 제1 목적은 결혼식이었다. 그래도 휴학의 마지막 여행이니 기간을 넉넉히 6일로 잡았다. 물론 김포에서 제주 가는 시간은 저녁 늦은 시간, 제주에서 김포로 오는 시간은 오전이니 엄밀히 말하면 제주에 있는 시간은 4일이나 다름 없긴 했다. 토요일 저녁과 목요일 오전, 시간이 간절하지 않은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는 시간대라 아주 싼 값에 비행기표를 끊었다.


김포에서 제주 가는 날, 공항에 너무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까치산을 지나면서 열차가 연착됐다는 걸 깨닫고 심장이 쿵쾅대기 시작했다. 5분 정도 늦게 도착한 바람에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캐리어를 집어들고 미친듯이 뛰었다. 평소에도 딱히 좋아한 건 아니었지만, 이번엔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에스컬레이터 구간이 정말 야속했다. 제주항공 발권 데스크는 하필 또 제일 안쪽에 있어서 2층을 한 바퀴나 뛰어야 했다. 발권 데스크 직원은 탑승수속 시작 여부를 확인하고는 아주 재빠르고 정확한 속도로 발권을 마치며 내게 탑승수속을 재촉했다. 분명 서둘러라고 말하는데도 너무 침착해서 오히려 내가 한시름 놓게 되었다. 보안검색대에서 뱀부 스마트 때문에 시간이 좀 지체되긴  했지만 비행기엔 전혀 늦지 않게 탑승했다. 스마트 펜이 생긴 건 지극히 일반 펜과 같은데 전자기장(?)이 잡혀서 그런 것 같다.


웬일로 발 앞 여유 공간이 넓다 했더니 내 자리가 딱 비상탈출구 쪽이었다. 몰랐는데 비상탈출구 좌석은 비상 시 탈출로 확보를 위해 짐을 머리 위 선반에 올려두어야 한단다. (여행 마지막날 김포행 비행기에서야 그 자리가 별도 구매 좌석인 것을 알았다. 막판에 기왕 남은 좌석 좋은 자리 준 것 같다.) 제주항공 승무원 복장은 아이보리 바탕에 귤색 포인트라 정말 깔끔하고 예쁘다. 그런데 색이 밝아서 승무원들은 많이 불편할 것 같다. 분명 속옷이 비치지 않게 옷을 단정히(!) 입으라는 규정이 있을테니 말이다. 갑갑할 것 같다.


그건 그렇고, 메이저 항공사는 주스 한 잔을 서비스로 제공해줬는데, 저가 항공에선 따로 돈을 내고 사야하는 모양이다. 트레이가 왜 저렇게 빠른 속도로 오지, 하던 궁금함은 트레이가 곁에 오니 알 수 있었다. 이번엔 무슨 주스를 마실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부질없는 짓이 되었다. 그래도 메이저와 저가 항공의 서비스 차이는 딱 주스 한 잔 뿐인데 이 정도의 가격 차이라면 나는 별 다섯 개 주고 저가항공 타련다.


이튿 날이었던 결혼식 날엔 한림에서 여객선 터미널과 공항으로 왔다 갔다 하며 가족들 배웅을 다니느라 어디 둘러볼 새도 없이 지나가버렸다. 그래도 비행기를 타기 전에 근처 어디 한 군데라도 더 보고 가자는 사촌 언니, 오빠의 의견으로 도깨비 도로와 공항 근처 용두암을 구경하러 갔다.


도깨비 도로는 아주 어릴 적, 아마도 초등학생 때 제주에 와서 들렀던 기억이 있다. 엄마가 물병을 굴렸던 것, 차를 타고 가며 오오오오 했던 것도 생각이 났다. 외삼촌이 음료수 하나를 사와서 굴리셨는데, "우와~"가 아니라 ".....오, 그러네." 하는 반응이 나왔다. 오빠가 이건 입장료 안 받을 만하네, 하며 웃었다. 눈에 보이기는 분명히 오르막길인데 물병은 굴러 내려가는 신기한 장면이었는데,  숙모만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하셨다. 설득할 일이 아닌 걸로 숙모를 설득하느라 언니랑 오빠가 엄청 열변을 토했다. 옆에서 보는 나한텐 도깨비 도로보다 숙모와 언니, 오빠가 더 신기했다.


용두암은 중국인 관광객들로 굉장히 북적이는 곳이었다. 명성에 비해 구경할 것은 딱히 없고,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주전부리 포장마차만 즐비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누가 이걸 용 머리라 부르기 시작했을까. 아무리 봐도 용 머리 모양이라 상상하기는 어려웠는데.


월요일은 계속 잠만 잠만 잤다. 전날 체한 데다가 많이 피곤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내가 잠만 잘 줄은 몰랐다. 화요일에도 낮에 겨우 겨우 일어나서는 점심을 먹고, 그래도 나가보자며 '사려니숲길'로 향했다. 집에서 2시에 나왔는데, 버스를 타니 2시 반, 사려니숲길에 도착하니 3시였다.



<사려니숲길에서 제주 시청 / 터미널 가는 버스 시간표>


저번에 이 길을 지나칠 때는 숲길이 여기서 보이는 정도, 도로 가로수 안쪽으로 듬성듬성 보이는 공간이 숲길인 줄 알았다. 이 길도 충분히 예뻤기에 숲길에 들어가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상상하며 사려니숲길을 꼭 걸으리라, 이번 여름부터 오고팠던 곳이었다.


사려니숲길에서 적어도 5시까지는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해가 지면 완전히 깜깜해져서 위험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우빈 오빠가 2시간이면 다 걷는다고 했어서, 나는 큰 걱정 없이 들어갔다. 나올 때가 되면 딱 5시가 될 테니. 그리고 또 입구에 관리사무소 차량이 있길래, 5시가 넘으면 확인 차원에서 이 차가 한 바퀴 돌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했다. 그러니 5시까지 빠져나오지 못해도 괜찮을 거라는 낙관인지 안일인지 모를 생각을 하며 출발했다.


이미 입장 시간부터 퍽 늦었던 터라 해가 저물어가며 드리우는 나무의 그림자들이 화려한 그림자의 그물을 만들었다. 이 시간의 햇빛이 낮보다 더 따사롭다.


이번 여름 제주 여행에서 알고 놀랐던 사실이, 제주에선 무덤 주변에도 돌담(산담)을 쌓고 정낭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정낭이 세 개 모두 걸려 있으니, 온종일 돌아오지 않을 예정이니 기다리지 말라는 뜻이다.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으니 기다리지 말고 너는 네 일상으로 돌아가라, 그런 뜻이려나.


이곳은 천미천. 강이 말라 나는 굳이 다리로 건널 필요가 없었지만, 비가 오는 날엔 저 다리를 이용해야 한단다. 사려니숲길 안내소에서 붉은오름 사려니숲길 입구까지가 8.8km인데 나는 1.2km를 걸어 여기에 도달했다. 이미 입구에서부터 배터리 떨어지는 속도가 심상치 않아 노래도 틀지 않고, 사진도 최대한 배터리 아껴가며 찍었는데 남은 거리가 한참이라 걱정이 되었다. 걸어 온 거리의 6배가 넘게 남았는데, 핸드폰은 거의 죽기 직전이었다.


해가 저물면서 길이 어둑어둑해지자 춥고 무서웠지만, 간간히 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만날 때 무척이나 감격스럽고 반가웠다. 햇빛 한 줄기의 위로가 이다지도 따스할 수 있을까. 공기가 반짝이는 느낌.


사려니 숲에는 조릿대로 빼곡한 곳이 많았다. 작은 이 풀들이 나무 사이를 빼곡히 채운 모습은, 마치 폭신폭신한 땅처럼 보이기도 하고 거인들과 난쟁이들이 함께 서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게 마지막 사진이었다. 총 거리의 1/4도 못 와서 핸드폰이 결국 꺼져버렸고 남은 거리를 나는 시간도 알지 못한 채 터벅 터벅 걸었다. 30분에 두 명씩 나를 지나쳐가거나 혹은 반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과 마주쳤다. 처음 출발할 때는 불쑥 나타나는 사람들이 내 평화와 고요를 방해하는 불청객이었는데, 해가 지고 핸드폰이 꺼진 상태가 되자 간혹 나타나는 이들의 존재가 내게 안심이 됐다. 아, 이 길에 내가 혼자가 아니구나. 또 누군가는 이 길을 걸어가고 있구나. (비록 그들은 둘이고 나는 혼자지만!)


무슨 생각을 하며 길고 긴 그 길을 다 걸었는지 모르겠다. 물찻오름이 중간 지점이고 이곳에서 길의 방향이 꺾이는데, 그래도 절반은 왔구나, 이제 정말 되돌아가는 것보다는 앞으로 쭉 가는 게 더 빠르게 나가는 길이구나, 하며 나 자신을 위로하고 응원했다.


해 떨어지기 전에 걸었다면 참 좋았겠다 싶었던 곳은 월든삼거리 삼나무숲이었다. 해는 저버렸고, 여명에 의지해 걸어가는 와중에도 숲이 예뻐서 그 광경을 즐겼다. 또 남은 거리가 이제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점차 줄어들고 설렘이 조금씩 자라기도 했다.


도착지에 가까워질 때 한 부부가 길 중간에 서 있다가, 나를 발견하곤 불안함과 기대가 뒤섞인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아가씨, 혹시 내려오면서 파란 외투 입은 여자 한 명 못 봤나요?"

"네, 못 봤어요. 제가 저쪽에서 이 방향으로만 왔는데, 반대 방향으로 가던 커플만 만났고 다른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요. 있었다면 못 봤을 리가 없는데."





사이렌 소리가 들리길래, 도로가 근처구나, 출구가 코앞인가보다, 하며 설레던 찰나, 그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구급차 한 대가 나타났다. 가다가 내 옆에 잠시 차를 멈추고 70 정도 되는 할머니 본 적 없느냐 물었다.


"할머니 한 분이요? 아뇨, 나이 드신 부부밖에 못 봤어요."


구급차는 다시 출발했고, 나는 걷기를 계속했다. 출구가 가까운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점점 여명조차 사라지고 있었다.


올라갔던 구급차가 할머니를 찾았는지, 다시 사이렌소리가 가까워졌다. 난 내심 구급차가 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길이 어두워 위험하니 나도 타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무심하게도 구급차는 쌩 지나가버렸다. 할머니가 위급한 상황이라 바로 병원으로 이송해야 했던지, 굳이 걷기 위해 이곳을 찾은 방문객을 차에 타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겠지. 아예 구급차가 없었으면 그런 기대도 안 했을 것을, 무심하게 지나가버린 구급차가 야속해서 괜히 원망스러웠다. 그나마 구급차가 멀어져도 빨간 백라이트가 나무 사이로 보여서 길 방향과 남은 거리를 가늠할 수 있었다.


구급차가 사라지고 난 뒤 길은 정말 빛 한 줄기 없이 깜깜해졌다. 눈도 어둠에 익숙해졌지만, 대신 공포가 조금씩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어둠은 그 자체로 두려웠다.





도로가 보였고, 나는 황급히 숲을 빠져나왔다. 당연히 5시는 넘긴 지 오래였고, 또 다른 입구인 그곳엔 출입금지용 줄이 쳐져 있었다. 내가 금지된 숲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느낌이 들어 기분이 묘했다. 길 건너에서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차 한 대가 정류장 가까이 다가와 멈췄다. 아까 그 부부 중 한 분이던 할아버지셨다. 여기는 버스가 잘 안 온다고,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하니 타라고 했다. 제주시청을 가는데, 방향이 같을까요-, 묻자 잠시 멈칫하시더니 거기까진 못 가지만 차 많은 곳으로 데려다주겠다 하셨다.


사정을 들어 보니 두 분은 부부지간이 아니라 생판 처음 보는 사이였다. 그리고 구급대원이 찾던 그 70대 할머니가 바로 내가 할아버지의 부인이라고 착각한 분이었다. 엄마 힘들면 잠깐 여기에서 쉬고 있어, 나 조금만 더 올라갔다 올게, 하고 사라진 딸이 내려오질 않아 할머니가 전전긍긍하며 딸을 찾던 거였다. 그리고 내려가던 그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혼자 두고 갈 수 없어 곁을 지키며 딸을 같이 찾으셨던 거고, 딸은 자신의 엄마를 보지 못하고 내려와 입구에서 119에 전화를 한 것이었다.


나를 태워주신 할아버지 덕분에 차도 많고 사람도 많은 마을 입구에서 시청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이모나 오빠가 전화를 안 받는 날 걱정할까 염려되어 다른 아주머니분들께 전화를 빌려보려고도 했는데,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거창한 부탁도 아닌데 그리 매몰찰 필요가 있었나. 그리고 빌려 줄 생각이 없으면 처음부터 거절을 하든가, 내려 준 아저씨는 누구며 왜 그 차에 탔는지 꼬치꼬치 캐묻고선 이상한 눈길로 훑으며 거절하는 건 또 뭐람. 버스를 타며 기사님께 시청 가는 지를 물을 땐 또 무슨 오지랖인지 그 아주머니가 대신 대답을 해줬다. 미운 털이 박혀서 그런 오지랖도 보기 싫었다.


아저씨가 내릴 때 황급히 쥐어주신 귤 하나가 그래도 기분을 풀어줬다. 집에 왔더니 이모는 역시나 이모답게 내 전화가 꺼진 줄도 모르셨고, 어련히 집에 잘 돌아오겠거니 하시며 걱정은 눈꼽만큼도 하지 않고 계셨다. 다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