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교환학생] 다른 문화를 보고 듣고 느낀다는 것

2017. 12. 5. 12:10독일생활/Tagebuch

2017. 11. 25. 

친구랑 둘이 앉아 공부'만' 하는 게 얼마나 가능성 희박한 일인지 경험적으로 자-알 알면서도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요엘이랑 점심 먹고 LSG에서 각자 공부하기로 했다. 요엘은 내일이 제출 마감인 두 장 짜리 레포트를 쓰는데 초집중했고, 나는 야심차게 독일어 원서 'Taxi'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결국 우린 "아 맞다, 있잖아…"의 마술에 굴복하고 말았다. 나야 그래도 거기까지 갔으니 서너 장이라도 읽었는데, 요엘은…….

 

발단은 요엘의 머리 속에서 맴도는 멜로디였다. 한국에 있을 때 카페에서 자주 들은 노래인데, 제목을 모른 채로 돌아오는 바람에 이제는 도무지 그걸 찾을 수가 없었단다.

 

"바다가 있는 도시에 대한 노래인데, 노래 덕분에 도시가 유명해졌대. 남자가 불렀고, 좀 서정적이었어!"

"그거 내 고향 이야기잖아, 여수밤바다. 내가 말해줬던 거 아니야?"

 

여수밤바다 노래를 틀어줬더니, 비슷은 한데 아니라고 그랬다. 더하여 나온 지 좀 된 노래고, 가을이 배경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바다가 있는 도시, 남자가 부른 옛날 노래, 옛날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

 

내가 말해놓고도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터뜨렸다. 노래를 들으며 앨범 커버를 본 요엘도 웃으면서 이렇게 올드한 건 아니라고 했다. 하기사 이 노래를 카페에서 듣진 않았겠지. '제주도의 푸른 밤'도 틀어보고, 바다가 아니라 한강인가 싶어서 '양화대교'도 틀어봤지만 요엘은 전주만 듣고도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여수밤바다는 아니라구? 확실히? 그러면 이야기가 섞였나. 가을이 아니라 봄 아니야? '벚꽃엔딩'이라는 노래가 있는데, 이게 봄만 되면 차트에 스멀스멀 올라오거든. 봄이면 진짜 어디에서든 다 틀어. 너가 봄에 한국에 있었으니까, 카페였으면 이 노래 많이 들었을 거야. 여수밤바다 부른 가수가 이것도 불렀어."

 

기타 연주에 요엘이 눈이 동그래지며 귀를 기울였다.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해서 한참 듣더니,

 

"비슷한데, 아니야."

 

아, 뭐지 진짜……. 이렇게 궁금한 거 생겼는데 못 찾아내면 혀에 가시가 돋는 나라서 어떻게든 찾아내야만 했다. 비슷하다고… 비슷하다고…? 그럼 버스커버스커인가? 여수밤바다랑 벚꽃엔딩이 들어있는 버스커버스커의 앨범 목록을 열었다. 봄바람? 첫사랑? 아니면 이상형? 외로움증폭장치, 골목길, 골목길 어귀에서, 전활 거네…… 꽃송이가?

 

와 전주 나오자마자 1초도 안 되어 요엘이 막 신나서 날뛰었다. 이거야!! 이거 맞아!! 이거야 이거!!! 이 노래 덕분에 유명해진게 단대 호수였나보다. 똑같은 물이라서 호수가 바다로 둔갑했던 것 같고. 요엘이 카페에서 많이 들었던 이유는 아마도 시즌상 벚꽃엔딩이 들어있는 앨범 전체를 재생해서 그런 거였겠지. 요엘은 "꽃송이가~"하는 부분을 듣고선 십년 묵은 체중이 내려간 듯 후련해했다. "좋아, 좋아! 하모니카 솔로!"하고 장범준이 외치자, "방금 하모니카 솔로라 한 거야? ㅋㅋㅋㅋㅋ 아 너무 귀엽다!"하고 좋아했다.

 

'꽃송이가' 찾느라 시작된 이야기가 요엘의 노래 추천으로 이어졌다. 재생목록에 올려 놓은 곡이 두 개인데, 하나는 Motrip(모트립)의 'So Wie Du Bist'고, 다른 하나는 Milky Chance(밀키 찬스)의 Stolen Dance다. So Wie Du Bist는 고등학교 때 많이 듣던 노래 스타일이라 귀에 익어서 금방 따라부르게 되었고, 밀키 찬스는 목소리가 좋아서 앨범 통째로 재생목록에 더해놓았다.

 

2017. 11. 27.

쯔슈앤과 첫 탄뎀 수업을 시작했다. (쯔슈안인 줄 알았는데, 쯔슈'앤'이었다. 정확히는 쯔슈ㅒㄴ ← 조합해서) 이제 막 자모 읽기를 시작하는 쯔슈앤과는 독일어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1:1 언어교환은 아니지만 내 딴엔 독일어 말하기를 연습할 수 있어서 정말 귀한 시간이다.

 

난관이었던 건 우리 사이에 세 가지의 읽기 방식이 있었단 거다. 주어진 자료는 영어식 발음 표기인데, 쯔슈앤은 중국인이라 핑잉도 쓰고, 우리끼리 대화는 독일어로 하다보니까 읽는 게 난잡해졌다. 중국어나 영어, 독일어에 없는 발음도 좀 어려워했다. 예를 들어 'ㅡ' 같은 것. 그리고 'ㅐ'와 'ㅔ'의 차이는 한국인도 거의 구분하지 못하는 거라 설명하기 난감했다. 발음이야 똑같이 하면 되니 어려울 게 없지만, 나중에 듣고 써야 하는 상황에선 순전히 암기로 구분해야 하니까 이것도 외국인에겐 넘어야 할 산이겠구나.

 

한국어를 모국어로만 배웠던 내가 외국인 시점에서 한국어를 다시 뜯어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언젠가 비문학 지문에서 본 적이 있다. 우리의 귀는 모국어의 음운 체계에 맞춰 훈련되기 때문에 분명한 발음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하기도 한다고. 나는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발음을 쯔슈앤은 분명하게 다르게 인식하고 있으니, 되려 가르치겠다고 나선 내가 "Ach so?"하고 되묻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또 반대의 상황도 있었다. 나는 '-n'과 '-ng'을 구분할 수 있는데 쯔슈앤은 그러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외국어를 배우면서 모국어의 음운 체계를 최대한 배제할 수 있는 능력이 바로 현지인 같은 발음의 관건이 아닐까 싶다.

 

2017. 11. 29.

Wortschatz 수업에서 독일어 욕을 살짝 배웠다. 다른 건 다 제쳐두고 기억에 너무나 강렬하게 남아 지워지지 않는 게 'Huresohn'이다. 'Hure'가 'Bitch', 'Sohn'은 'Son', 그러니 영어로 치자면 'son of bitch' 정도 되는 단어다. 되게 구닥다리 욕이고, 성차별적이기 때문에 이젠 잘 안 쓰는 말이라는데. 근데, 발음이 '후레존'이다. 후레자식이라니. 깜짝 놀라서 지수한테 "헐, 후레자식이 Huresohn에서 온 거야?"하고 물었다. 아 진짜 핵몽총인가. 생각 좀 하고 말하자.

 

2017. 11. 30.

얼마 전 서울에 첫눈이 내리고, 첫눈은 매년 내리는 데도 항상 '첫'눈이라 해서 설렌다는 어느 분의 일기를 읽었다. 맞아, 나도 왠지 모르게 그렇게 된다. 다른 건 몰라도 '첫눈'은 붙여써야 하는 단어다. 내가 정한 게 아니라 규칙이 그렇다. '첫-'은 관형사라 띄어써야 하는 줄 알았는데, '첫눈'과 '첫사랑'은 예외라 해서 처음엔 어이가 없었다. 국어 과외 하다가 내가 틀려서 그랬다. 하지만 생각해볼수록 그 예외조항이 참 애틋한 것 같다. 합성어로 인정될 만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첫눈과 첫사랑에 추억을 간직하고 있다는 말이니까. 작년엔 누구와 첫눈을 맞았더라.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혼자 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올해의 첫눈은 내년이 되어도, 내후년이 되어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첫눈이라 말하기엔 조금 소박한, 지금 눈 오는 거야, 하고 가만히 바라보고 있어야 겨우 알 듯 말 듯한 눈이었다. 파울과 마주 앉아 따뜻한 커피를 마시는데, 점차 눈이 푸슬푸슬하게 내렸다. 올해의 첫눈, 낯선 곳에 뚝 떨어진 나를 처음 맞아준 친구, 처음 와 본 안락한 카페.

 

저녁에 크리스마스 마켓을 구경하던 찰나엔 갑작스레 눈이 쏟아져 내렸다. 거칠게 내리던 눈은 점차 진눈깨비가 되어 추적거렸다. 그런데 세상 진눈깨비마저 로맨틱하다니. Glühwein에 결정이 닿아 스르르 녹아들었다. 조명이 비추는 눈발은 꼭 은하수처럼 반짝거렸다.

 

그 와중에 전날 염색한 빨간 머리가 진눈깨비에 젖어 하얀 목도리를 붉게 물들일까봐 걱정도 하고.

 

-

 

요엘이 누텔라 크레페를 사먹길래 옆에서 "맞아, 누텔라는 언제나 참이요 진리지."하고 거들었다. 하지만 난 두 번 다시 누텔라 통을 사지 않는다. 500g에 50g이 추가로 들어있는 용량을 샀다가 10일만에 그 많은 양을 다 먹어버렸는데,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깨닫고선 스스로를 부러 유혹의 시험에 들게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한국에선 이거 악마의 잼이라 그래."

"그거 말 되네."

"유혹이 엄청나잖아. 그리고 이거 먹다보면 양심에 좀 찔리니까. 나 누텔라 한 통 샀다가 10일도 안 돼서 다 먹어버렸잖아. 하… 그래서 이제 누텔라 안 사."

"ㅋㅋㅋㅋㅋㅋ뭐 숟가락으로 퍼먹기라도 했어?"

"…응."

"뭐? 당연히 난 농담이었지! 진짜 그랬다고?"

"악마의 잼이라니까."

 

-

 

크리스마스 마켓을 너무 열심히 돌아다녔는지 요가 수업에 가기 전부터 이미 피곤이 몰려왔다. 오늘은 명상 많이 했으면 좋겠다, 내심 속으로 바라며 수업에 들어갔다. 근데 이게 웬걸, 오늘은 정말 내가 알던 그 요가로 처음부터 끝까지 빡빡하게 프로그램이 짜여있었다. 울어야 할 지 웃어야 할 지. 레그레이즈를 비롯해서 그와 비슷한 근력 운동 시리즈, 활 자세까지 나왔다. 하다보니 잠은 달아나고, 기대하던 것들이 드디어 등장해서 막 설레고 신났다.

 

오늘 자전거 없다며 수업 끝나기 조금 전에 나와서 버스타고 집 갈 거라던 현아도, 바라던 요가가 등장하니 재미있었는지 중간에 내게 속삭였다.

 

"언니, 나 그냥 끝나고 언니랑 같이 걸어갈래."

 

아이 참 귀여운 가시나.

 

2017. 12. 02.

괴팅엔에 함박눈이 내렸다. 하지만 요가 근육통으로 골반과 다리가 연결되는 부분 근육이 너무나 아파서 제대로 서지도 못한 채 집에서 요양했다. 요양원 뷰가 죽인다.

 

2017. 12. 04.

쯔슈앤, 시얜이랑 크리스마스 마켓에 놀러갔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누델을 사먹고, 저 안쪽 숨겨진 플리마켓을 찾아가 Glühwein도 한 잔씩 마셨다. 플리마켓의 글뤼바인은 메인 마켓보다 50센트 더 저렴한데, 알콜 향은 덜 나서 더 맛있었다. (이 사실은 지수가 알려줬다.) 보증금도 1유로로 다른 곳보다 저렴한데, 컵이 일반 유리컵 아니면 2014년 컵을 사용해서, 가져가는 의미가 없으니까 그런 것 같다.

 

쯔슈앤이나 시얜이랑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일상생활에서 소재가 많이 등장하니, 의외의 문화 차이를 알게 된다. 저번엔 중국에선 여자들이 생리할 때 건강에 좋으라고 흑설탕을 따뜻한 물에 타서 마시거나, 대추를 생으로 혹은 차로 마신다는 사실을 듣게 됐다. 흑설탕물은 완전히 생소한 문화라 하니, 되려 시얜이 더 놀랐다. 이 친구들한텐 너무나 당연한 습관이라, 생리 하면 으레 마땅히 그렇게 하는 거라고 여겼나보다. 한국 여자들은 단 걸 많이 먹긴 하는데, 그냥 생리 때 유독 더 당기니까 그럴 뿐, 그게 건강에 안 좋으면 안 좋았지 딱히 좋지는 않은 것 같다고 답했다.

 

오늘은 글뤼바인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자연히 '술'이 대화의 소재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소주나 맥주를 자주 마시고, 나도 신입생 때는 진짜 많이 마셨다고 했다. 쯔슈앤이 레드와인을 베이스로 한 글뤼바인을 바라보다가 생각이 났는지, 매일 한 잔씩 레드와인을 마시면 여자한텐 되게 좋다는 걸 알려줬다. 모든 음식이 실은 다 그렇잖아, 몸에 좋은 효능은 저마다 있지. 소주나 맥주도 그럴 거야. 중요한 건 '적당량'과 '꾸준함'인데, 그걸 못 지켜서 문제지. 그랬더니 쯔슈앤이 맞아 맞아, 근데 레드와인 꾸준히 마시는 건 남자한텐 효과가 없대, 여자한테만 그렇대. 하고 첨언했다. 그러더니 의아하다는 듯, 근데 한국 여자들도 일반적으로 소주나 맥주 마셔? 하고 물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를 잘 못했다. 질문의 의도를 파악해지 못해서. 쯔슈앤이 그렇게 물은 건, 중국에선 우리 또래는 물론 여자들은 술을 잘 안 마셔서 그런 거였다. 한국에선 술 마시는 거에 여자 남자가 그리 의미있진 않다고, 그냥 술자리 가면 다 같이 마시는 거라고, 주량이 남자보다 센 여자도 많다고 그랬더니 쯔슈앤이 놀랐다. 중국에선 여자들은 보통 술자리에서 오렌지주스나 콜라를 마신다고 했다. 술을 마시더라도 엄청 조금 밖에 안 마시고, 자기도 그렇다고. 들고 있던 글뤼바인도 한두 모금밖에 안 마시고 카운터에 컵을 반납하려 했다. 어, 너 그거 안 마시려고? 그럼 내가 대신 마실게. 꼴깍꼴깍 원샷했다. 크-

 

저번 수업 땐, 공수 자세를 소개하면서 망자 앞에선 손 순서가 반대라고 하며 '장례식'을 언급했다. 그런데 선생님이 "아, 한국에 장례식이 있나요?"하고 묻기에, "네, 당연하죠."라고 말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당연한 게 아니에요."하고 말씀하셔서 적잖이 당황했다. 원래 선생님 말투가 되게 단호해서, 난 내가 뭐 잘못 대답한 줄 알았다. 당연한 게 아니라는 말은 정말 말 그대로 장례식의 존재가 당연한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한국사를 배우면서도 장례 풍습이 언급되지 않은 시대가 없었기에 장례식이 없는 나라가 있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시간적인 예시로 공간적인 이해를 해버리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미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장례식 장면이 자주 등장하니까, 으레 장례식은 망자의 가는 길을 배웅하는 인간의 공통 의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작은 교실 안에서 장례식 문화권 사람 수 만큼이나 장례식이 없는 문화권 사람도 많았다. 서로 다른 자연 환경과 사회 속에서 문화란 건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는 개념을 배우면서는 너무 당연한 소리를 굳이 이렇게 하나 싶었는데, 그게 당연한 게 아니라서 굳이 짚어야 했던 거였다. 당연한 문화는 없다는 걸, 이렇게 허를 찔리며 배운다.

 

+

저번에도 느꼈지만, 여긴 사이렌 울리는 경찰차나 응급차 비켜주는 속도가 LT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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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누군가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잠 자는 나를 바라보다 나가거나, 무척 키 큰 사람의 형상이 베란다를 지나가는 꿈을 꾼다. 꿈인 건 분명해서 다행인데, 그래도 이런 꿈은 안 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