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노마드] 한글 서체 디자인 12기

2016. 11. 25. 05:09문화생활/특강

2016. 10. 15 ~ 11. 19.


한글 서체 디자인


 작년 말 우연히 DDP에서 참여한 손글씨 콘테스트에 당선되어 내 손글씨가 '영록체'라는 이름의 폰트로 만들어졌다. 아무래도 폰트이니 내가 직접 쓸 때보다 더 정갈하고 깔끔할 거라 기대했는데, 막상 받아보니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글자의 양 옆 여백 균형이 맞지 않아 글자가 한 쪽으로 쏠린 것도 있었고, 글자 간의 크기도 균일하지 않아 쓰다보면 홀로 작고 좁게 등장하는 글자도 있었다. 그 폰트를 받아 본 후부터 내가 직접 폰트 디자인부터 제작까지 다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click] '영록체' 다운로드


 팔로우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디노마드'에서 폰트 제작을 알려주는 강의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려 한국 폰트 회사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산돌에서 일했던 디자이너가 직접 지도하는 강의였다. 그때 캡쳐를 한 게 9기였던 것 같은데, 여행 일정에 밀려 결국 12기를 듣게 되었다. 12기 수업도 신청은 한참 전에 했는데, 무슨 사정인지 강의 시작일이 밀려 원래 공지된 것보다 몇 주 늦게 개강했다.



# 1강


 토요일 7시, 시간에 맞춰 들어갔더니 스크린에 고딕체로 '장수영' 하고 세 글자만 떡하니 떠 있었다. 15명 정원 강의에 10명 정도의 사람이 와 앉아 있었다. 돌아가면서 자기소개를 했는데, 각자 좋아하거나 자주 쓰는 폰트를 이야기 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들어보니 절반은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생이거나 관련 직종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이었고, 나머지 절반이 비전공자였다. 그런데 그 비전공자들도 나름 이리 저리 디자인하는 사람들과 같이 일하는 이들이었다. 진짜 쌩 비전공자는 나를 포함해 몇 안 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폰트도 '윤고딕', '윤명조', 'Helvetica'가 제일 많았다.


 사람들이 폰트를 하나씩 이야기할 때마다 선생님이 그 폰트와 관련된 설명을 하셨는데, 나는 처음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Helvetica'나 'futura'라는 폰트도 처음 알았고 그게 그렇게 유명한 폰트인지도 몰랐다.


- 오블릭(기계적인 기울임) vs 이탤릭 (손글씨 기울임)


- 제목용 폰트(2350자) / 외계어 포함 (11172자)


- 사진식자기술 : 필름을 조판해서 인쇄하는 기술


- 굴림체 : 일본식 서체를 한글화(한 거라 디자인하는 사람들 중에선 쓰기를 꺼리는 이들이 많음) / window에서 디폴트 서체가 필요했는데 이때 굴림체를 채택.


- 'futura' : 'Helvetica'만큼 많이 쓰는 서체. 모던한 느낌. Geometric Sans(지오메트릭 산스)_자폭이 왔다갔다


- 한글 구성 요소

> 자면(letter face) : 납 활자에서 잉크가 닿아 찍히는 면

> 여백 : 글자의 성격을 보려면 여백(공간 분배)를 봐야 함

> 무게중심 : 영문은 baseline이 명확함. 그런데 한글은 무게중심 찾기가 어려움. 특히 네모꼴... 공간 분배가 우선인 경우가 많다

> 자폭

cf. 책_선형적 / PC, 모바일_비선형적

> 굵기 : 예전엔 L, M, B / 요즘은 family

> 홑자(모음), 닿자(자음)_첫/받침

> 속공간

> 가로모임 / 세로모임 / 섞임모임


- 영문은 조각이라면 한글은 건축. 자소 각각의 디자인 + 합자


- 요즘은 닿자들이 크게 나옴

ex) 산돌고딕 Neo 1 (각자의 공간을 양보하지 않음) ↔ 견출고딕 (싸우고 싶지 않아함)


- 글자를 만들 때 공간을 어떻게 풀어낼지 먼저 정의를 해야 함


- 윤고딕 300 + Helvetica = 어울리는 조합


- 시각착시 : 중심, 크기, 공간, 굵기



[과제] 아이디어 스케치

- jangsooyong.com → 'Type' 정도로 아웃라인을 진하게. 러프하게 OK

- 처음에 어디에 어떻게 쓸지, 결과물도 고민해보기!

- 영화 포스터의 폰트 리디자인을 해도 좋음

- 조합이 복잡하면 배울 게 많음

ex) 여행이 일상 < 원, 빼

- 글자를 사람에 비유해보자 



# 2강


고민 고민하며 들고 간 아이디어 스케치! 태블릿에 이것 저것 그려보며 고민하다 통째로 들고 가 파일을 넘겨드렸다. 다른 사람들을 보니 특정한 이미지를 폰트로 형상화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다르게 나는 내 사인에서 착안해 '자소를 모두 하나의 선으로 연결해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아이디어를 개진했다. '정영록'이라는 이름은 워낙 많이 써 본 글자라 낙서하듯 사인하듯 쓰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게 한 획으로 쓸 수 있었는데, 다른 글자들을 이렇게 만드는 건 꽤나 어려웠다.

[헬로우 / 정영록 / 전자회로]


[디노마드 학교]


[자야하는데 큰일났네]




[선생님 코멘트]


- '정영록'은 충분히 알아보겠는데, '헬'이 전혀 '헬'로 읽히지 않음

- 기본적으로 읽기 위해 만드는 글자이니 최소한 글자가 읽혀야 함

- ㅇ과 ㅎ이 너무 작음. 닿자인지 점인지 구분하기 어려움


- 아방가르드 굿!

- 직선으로 자대고 만들어서 비교해보길. 다만 선생님은 손글씨 느낌이 나을 듯

- 글자를 많이 만들어보기




# 3, 4강



 2주차에 폰트랩 다루는 방법을 간단하게 배우고 3주차부터 글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4주차까지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모듈을 수정했다. 컨셉과 가독성 사이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며 밀당을 했다. ㅇ도 크기를 키우고 ㅇ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연결'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얇은 선으로 이어볼까 했는데, 선생님은 연결된 이 선이 생뚱맞다 하셨고, 가와 거의 컨셉이 전혀 다르다고 지적하셨다. 헝ㅠㅠㅠㅠㅠ



# 5강


 5주차엔 '영원한기록'으로 다섯 글자를 만들어 갔는데, 굉장히 파격적이고 대각선으로 이루어진 '영'과 나머지 '원한기록'의 컨셉이 다르다고 하시면서 다수를 따라 '영'을 수정하든지, '영'의 컨셉과 같이 갈 수 있는 글자 몇 개를 찾아 그걸로 단어를 만들든지 선택해야 한다 하셨다. '영'이 정말 운 좋게 얻어 걸린 거라, 후자로 가는 게 굉장히 힘들거라고도 말씀하셨다. 거기다 아쉬운 듯 '처음에 가져온 그 손글씨 느낌 좋았는데…….' 말끝을 흐리셔서 힘이 쭉 빠져버렸다.


 사실 나는 '아, 이번 주엔 거의 완성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가져가서 파생만 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다섯 글자를 들고 간 거였다. 그런데 또 다시 아이디어 스케치로 돌아와버리게 되니 정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혔다. 남들 다 그럴싸하게 완성해가는데 나는 리셋이 된 거다. 거기다 모듈 고민만 몇 주째였는데, 모듈 자체의 한계 때문에 '영'이 가진 느낌으로 글자를 파생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고, '디자이너들이 이런 걸 안 만들어 보았겠느냐'는 말에 머리를 얻어 맏은 것 같았다. 하긴 그랬다. 디자이너들이 영어 필기체처럼 한글 서체를 만들어보려는 시도 한 번을 안 해봤을까, 다 해봤는데 안 되니까 안 만드는 거고 없는 거였다. 내 노력이 다 무지의 패기와 오만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 한없이 부끄럽기도 했다.


 그래도 '영'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영'에서 모든 아이디어가 시작된 거니까. 폰트를 포기하고 레터링으로 가기로 했다. 소신있게!



# 6강


 '원'을 '영'에 맞게 고쳤다. 다른 글자는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어서 다 버리고 '원'만 남겼다. 적절한 이미지를 골라 두 글자를 얹었다.


6주의 결과물! 크!


 삼각형은 바로 '펜로즈의 삼각형'이다. 언뜻 보면 입체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3차원인 현실에서는 절대 존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삼각형이다. '영원'도 그러하다. 시공간의 무한한 확장으로 '영원'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만들어지거나 태어난 것으로, 반드시 소멸하거나 죽음을 맞이한다. 즉 '영원'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절대 존재할 수 없다. 마치 '펜로즈의 삼각형'처럼…….


 하고 수학자며 불교 철학이며 갖다 붙여서 말도 안 되는 말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진짜 운 좋게 얻어 걸렸을 뿐이다. ㅋㅋㅋㅋㅋ 단지 우주를 배경으로 하면 '영원'이라는 글자의 의미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무한을 상징하는 듯한 삼각형이 있는 이미지를 찾았고, 거기다 '원'자의 ㄴ, ㅓ와 삼각형이 굉장히 잘 어울려서 딱 좋다 싶었다. 그런데 나중에 찾아보니 말도 그럴싸하게 만들 수 있게 된 거다. 허허.


 선생님께 칭찬도 받았다! 소신이 맘에 든다 했다! 글자도 멋있다 했다! 엑소 뮤비 맨 마지막에 나올 것 같다고도 하셨다! 이 이미지 나중에 수업 홍보 자료로 써도 되겠냐 물으셨다! (내 수강생이 만든 거라고, 심지어 비전공자가 이 정도로 만들었다고 하신댔다! 헿ㅎㅎㅎㅎㅎ) 게다가! 게다가! 감각이 있는데, 이쪽 일 해볼 생각 없냐고 하셨다! 크으~~~


 마지막에 칭찬을 들으며 끝내서 정말 기분도 좋고 홀가분하다. 마지막 결과물을 들고 갈 때까지만 해도 자신도 없고 허망한 기분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칭찬을 들어 마치 내가 되게 잘 끝낸 것 같고 기특하고 그렇다. 이렇게 귀가 얇다. 그래도 선생님의 칭찬 덕에 폰트 디자인을 계속해서 배우겠다는 마음이 확고해졌다. 쌤, 감사해요!


 한글 너무 매력있다. 큰일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