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네 명이서 렌터카 빌려 떠난 아이슬란드 여행

2018. 1. 2. 11:24해외여행/2017 크리스마스 유럽여행

2017. 12. 24 ~ 2018. 1. 1.



케플라비크

색을 등 뒤로 돌려 매고, 노트북도 캐리어 안에 다시 넣고, 장갑도 허리춤에 달았다. 가방을 무조건 하나만 들고 기내에 탑승할 수 있다는 이지젯의 조건 때문에 가방으로 간주될 수 있는 건 무조건 다 없애야 했다. 내 앞에 선 사람도 들고 있던 핸드백을 패딩 주머니에 구겨 넣고 있었다. 사람 다 똑같구나, 웃겼다.


잠에 취한 듯 두 시간을 자고 나니 어느새 케플라비크에 착륙하고 있었다. 부랴부랴 챙겨 일어나는데 내 겨자색 모자가 보이질 않았다. 착석하고 나서 모자를 벗은 기억은 확실히 나는데, 아무리 뒤져도 모자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나가야 할 시간이 다 되어 모자를 찾지 못하고 쫓겨나듯 내렸다. 승무원들이 모자를 찾거든 저쪽에 맡기겠다했지만, 이미 승객 다 내린 좌석에서도 안 보이는 모자가 나타날 리 없으니 못 찾는다 여겨야 했다. 아 내가 제일 아끼는 모자인데, 게다가 왜 또 가장 필요한 순간에 이렇게 사라져버린담. 이건 내가 모자에 무심해서 잃어버린 것도 아니라서 정말 억울하고 아쉽다.


공항에서 숙소까지 'Flybus'를 타고 이동했다. 2500크로나. 대충 이만 오천원 정도인 셈. 인천에서 서울 가는 버스 탔다 생각하면 되는데, 그래도 역시나 비싸다.




첫날 밤

숙소는 컨테이너 박스로 지어진 별장같은 느낌. 나무바닥.


카드게임!

그리고 역시나 연애와 실연 이야기는 새 친구와 친해지는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 : )


물에서 나는 계란 냄새. 그럼 유황 온천수인가.


문 연 곳이 없다. 마트 4개를 확인했는데도. 그래서인가 시내에 문 연 몇 안 되는 식당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결국 맨손으로 숙소에 돌아와 며칠 후에 깠어야 할 비상식량, 라면을 꺼내 먹었다. 그래도 냄비에다 쌀밥 지어서 밥에다 꾹꾹 말아 먹었다.


게임 하다보니 또 출출해져서, 아이디어 번뜩, 후다닥 만들어낸 게 식빵을 튀기고 설탕으로 시럽을 만들어 묻힌 식빵튀김! 2년 동안의 자취와 교환 생활로 늘어야 할 건 안 늘고 이런 야매 요리와 잔머리만 늘었다.


지호가 스코티시 억양을 알려줬다. 전에 교환학생 중에 영국에서 온 여자애가 있었는데 억양이 하도 독특해서 저 친구는 사투리를 쓰는 걸까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 새로 들어간 수업에서도 교수님이 독일어를 쓰시기는 하는데 억양은 그 친구와 똑 닮아 있길래 같은 지역 출신인가 싶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 사람들이 스코틀란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은근히 강원도 사투리와 비슷한 느낌이 있다.




레이캬비크의 크리스마스

옷을 두껍게 껴입고 레이캬비크 시내를 구경하러 나왔다. 크리스마스니까 교회에서 맛있는 간식을 나누어주거나 특별한 이벤트를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이름도 어려운 할그림땡땡땡땡 교회에 가장 먼저 달려갔다. 할그림스키르캬! 그래도 이제 세 글자 외웠다. 처음엔 '할' 한 글자밖에 기억하지 못했는데.


할그림스키르캬는 내가 지금까지 봐왔던 교회와는 사뭇 다르게 생겼다. 한국 교회와는 당연히 다르거니와, 유럽의 성당이나 교회들과도 전혀 다르게 생긴 건축물이었다. (아이슬란드의 다른 마을을 둘러봤을 때에도 할그림스키르캬같은 교회는 없었던 걸 보면 이 건물이 독특한 양식으로 지어진 듯하다.) 레이캬비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이 교회는 저 멀리 있는 항구에서도 우뚝 서있는 첨탑이 보일 정도였다.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가질 않고 문 앞에서 서성이고만 있었다. 문은 굳게 닫혀있고, 밖에 붙은 스케쥴표에도 오늘은 첨탑에 오를 수 없다고 적혀있었다. 아, 크리스마스 간식이나 점심밥은 허황된 꿈이었구나. 아쉬워라. 내심 기대를 하고 왔는데 좌절되니, 배가 갑자기 막 고파왔다. 그때, 교회의 커다란 문이 열렸다! 두 시에 있을 예배를 위해 한 시부터는 출입할 수 있게 열어준 거였다. 누구든 원하는 사람은 크리스마스 특별 예배에 참석해서 같이 찬양할 수 있다고 했다. 배고픈 자에게 빵도 나누어 주었으면…….


교회를 빠져나와 마트를 찾아 나섰다. Bonus에 거의 다 도착했을쯤, 코너에 있는 작은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버거를 파는 가게였는데, 창문에 대문짝만하게 '치즈버거 4개 + 코카콜라 2L + 감자튀김' 세트를 판매한다고 적혀있었다. 어제 봐둔 햄버거 가게에 비하면 가격이 정말 정말 정말 착한 수준이었다. 한국 맥도날드에서 세트 네 개 시켜 먹는 가격과 엇비슷했으니까, 아이슬란드로 치면 매우 저렴한 거였다.




호텔 드랑쉴드

이번 숙소에선 조식을 주기 때문에 신경써서 정말 일찍 일어났다. 7시 반이었는데도 밖은 한밤중처럼 깜깜해서 자다 잠시 새벽에 깬 느낌이었다. 어제 일찍 잔 것도 아니었던데다, 밤에 목이 너무 말라서 계속 뒤척이다 넷 중 가장 늦게 잠들었어서 일어나기가 배로 힘들었다. 오전 열한 시는 되어야 해가 뜨는 이곳 아이슬란드에선 커튼이 없어도 암막커튼을 쳐놓은 것 같다. 아침에 햇빛이 없으니 정신을 차리는데도 한참 걸려서, 암막커튼을 사려던 생각이 싹 사라졌다. 졸리면 잠에 들었다가 아침 햇살에 잠을 깨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해 없는 아침을 맞아보니 더 절절히 알겠다. 한겨울의 아이슬란드에선 한낮에도 석양을 볼 수 있고, 오후 4시 쯤 해가 지고 나면 그 뒤로는 지금 시간이 몇 시인지 도통 알 수가 없으니, 오히려 밤이 길어 더 늦게 자게 되는 것 같다. 해가 떠 있는 시간에 돌아다녀야 하니 해 없을 때 일어나 움직여야 해서, 되려 잠이 부족해지고 있다.


조식은 으레 나오는 음식들, 샌드위치와 시리얼, 뮤즐리 같은 게 나왔다. 하지만 만족도는 진짜 최고. 샌드위치에 발라먹을 수 있는 것도 잼 두 종류와 버터, 피넛버터, 심지어 누텔라까지 있었다! 햄도 세 종류, 비엔나 소시지, 베이컨도 있었다. 음료도 갖가지 커피 종류를 포함해 오렌지 주스와 사과 주스, 따뜻한 우유에다 코코아 가루를 넣어 핫초코를 만들어 먹을 수도 있었다. 오트밀을 죽처럼 만든 것도 있었는데, 처음 맛 본 음식이었지만 꽤나 맘에 들었다. 그중에 몇 안 되는 따뜻한 '식사'류의 음식이어서 속을 달래줄 것 같았고, 소화도 잘 될 것 같았다. 특이했던 것은 요거트의 맛이었다. 플레인 요거트였는데 탄산이 느껴져서, 시럽까지 더해 먹었더니 요거트랑 사이다를 섞은 것 같은 맛이 났다. (저녁엔 그릭요거트에 뮤즐리를 섞어 먹었는데, 그릭요거트는 정말 정말 되직했다. 올모스트 치즈인 우유를 먹는 느낌이랄까.) 커피는 진짜 맛없었다. 그나마 따뜻할 땐 몸이라도 데피자며 마셨는데, 나중에 식은 커피를 마시니 정말 쓰디 쓴 약이나 다름 없었다.


오늘은 컨디션이 정말 엉망이었다. 어젯밤부터 상태가 영 좋지 않아 잠도 쉽게 들지 못했는데, 오늘 일어나보니 완전 코맹맹이에 목도 찢어질 듯 아픈 게 빼도 박도 못하게 감기에 걸린 것 같았다. 히트텍 두 개를 겹쳐 입고 그 위에 반팔티를 입은 후 니트를 맨 위에다 입었다. (원래 귀도리였던) 작은 목도리를 목에 감고 그 위에 또 니트 목도리를 칭칭 감아 눈만 내놓고 다 가렸다. 모자도 푹 눌러 쓰고 패딩 모자까지 두 겹으로 써서 절대 벗지 않았다. 요가바지를 입고 그 위에다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었다. 바람이 들지 않게 종아리 지퍼도 끝까지 다 잠그었다. 양말에다 수면양말까지 겹쳐 신었다. 그런데도 오한이 들고 콧물이 흘렀다. 코가 막히니 귀도 먹먹하고 머리가 띵하게 아파왔다. 이런 몸 상태로 낮 내내 찬바람을 맞았으니 상태가 좋아질 리 있나. 이번 해엔 감기 안 걸리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막판에 이렇게 대판 걸려버리는구나.




스카프타펠은 주차장까지만

스카프타펠까지 가는 길은 시시각각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쏟아져내릴 듯한 산 아래를 지나고 나니 드넓은 평원이 등장하고 온갖 크기의 돌덩이가 평원 이곳 저곳에 던져져있었다. 도로 양쪽으로 강인지 뭔지 모를 물들이 얼어 햇빛을 반사했다. 저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은 햇빛을 받는 쪽은 연한 분홍빛, 반대편은 연한 하늘빛을 띠어 2016년의 팬톤 컬러 조합 같았다. 중간 중간 나타난 건물이 없었다면 정말 외계 어느 행성에 떨어진 거라 해도 수긍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풍경이었다.


그러다 또 깎아지른 절벽이 등장하고, 이끼만이 가득한 산이 나타났다가는 다시 하양만이 가득한 세상으로 변했다. 하늘이 무지개빛 그라데이션으로 물드는 순간도 있었다. 빈 땅이었지만 비어있던 공간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해가 뜨는 시간에 맞춰 출발했는데도 스카프타펠에 도착했을 땐 이미 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스카프타펠 투어는 따로 신청하지 않아서, 막상 주차장에 도착하고 나니 과연 들어갈 수나 있는 걸까 막막해졌다. 도착하면 투어를 끼지 않고 개인적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어 따라가면 될 줄 알았는데, 다들 투어용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 인당 10만원, 종류에 따라 거의 20만원에 육박하는 투어 비용은, 큰 맘 먹고 아이슬란드에 왔다 해도 쉽게 낼 수 없었다. 

"한 명 몰빵해서 투어 보내줄까? 카드 게임으로?"

그놈의 카드 게임. 하지만 정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올라갈 엄두조차 나지 않을 가격이었다. 검색해보니 개별적으로 올라갈 순 있어도 여름에나 가능한 일이고, 겨울엔 다들 투어를 신청해서 가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등산화와 아이젠이 없으면 절대 절대 올라가선 안 된다고 했다. 나랑 수빈이 신발도 아슬아슬한 판인데, 지호와 다윤이의 털부츠는 겨울 산을 오르기에 너무 위험했다. 정말 올라갈 거라면 아이젠도 대여해야 했다.


해 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스카프타펠이나 요쿨살롱 중 하나만 고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장비도 없고 투어비는 비싸니, 스카프타펠은 이렇게 와본 걸로 치자 하고선 요쿨살롱을 가기로 결정했다. 빙하가 떠내려가는 호수, 요쿨살롱에 가려면 스카프타펠에서도 40분 가량을 더 동쪽으로 달려야 했다. 이번 여행에서 우리 팀이 가는 극동 지점이 바로 요쿨살롱이었다.


스카프타펠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산을 바라보는데, 골짜기에서 쏟아질 듯 얼어있는 눈들이 형광 초록빛으로 빛났다.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요쿨살롱까지 가는 길에는 또 스르륵 잠이 들었다. 지호가 탄성을 내지르며 왼쪽을 보라고 외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창 밖을 바라보았다. 다리를 건너던 참이었는데, 호수 위에 큼지막한 얼음 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반대편엔 바다가 있었고, 해가 수평선 가까이에 떠서 구름 사이로 찬란한 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햇빛이 호수 뒷편의 산으로 가닿아 풍경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얼음 호수, 초록빛의 투명한 빙하, 분홍빛 산, 무지개빛을 반사하는 눈. 미쳤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풍경이었다. 저기에 떠내려가는 저 얼음덩이가 천 년 동안 얼어있던 거라니.


빙하 투어를 하는 사람들은 빙하를 조금 떼어 먹는 특별한 의식을 한단다. 동상을 보면 꼭 신발이나 코 등을 문지르며 소원을 빌 듯, 빙하를 보면 떼어 먹는 게 으레 그렇게 하는 건가보다. 관광객에게 재미를 선사하는 작은 이벤트라고 하면 별 걸 다 한다 하겠지만, 천년의 시간을 맛보는 거라 여긴다면 그만큼 경이로운 순간이 있을까 싶다. 우리는 호수 얼음에 가닿을 수 없어서 감히 시도조차 못했기에 상상만으로 놀라움을 느끼는데 만족하기로 했다.


경사진 자갈밭에 한참동안 앉아 저 멀리 보이는 풍경을 지켜보았다. 오로라보다 더 시규어 로스의 노래가 어울리는 장면이었다. 시선의 프레임 안에 잡히는 인간이 오점으로 보였다. 나 또한 이 대자연에 침입한 한낱 관광객이니 감히 그런 불평을 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곳에 관광객 한 명 없이 오롯이 저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큰 감동이 밀려왔을까, 보면 볼수록 그런 아쉬움이 커지는 곳이었다.


정말, 이 대자연 앞에 한 인간이란 얼마나 작고 초라한 존재인지. 고작 한 시간 밖에 서있었다고 발가락이 띵띵 얼고 손가락이 다 굳어서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켜본 요쿨살롱이었다.




초코볼 배팅왕

새로운 카드 게임, 블랙잭! 어제 사둔 초코볼을 걸어 1등은 배팅된 모든 초코볼 + 배팅한 초코볼의 2배를 얻기로. 어제의 말단 피카츄가 오늘은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초코볼 봉지 탈탈 털어 나의 것이 되었다. 다윤이에게 사채 제의까지.


하지만 왕게임에선 다시 피카츄로 전락. 피카피카피카츄우우우우우


아쉽게도 오늘은 구름이 많이 껴서 오로라 보긴 글렀다.




마치 다른 낯선 행성 같던

엊그제 밤에 오로라를 보기도 했던 Black Sand Beach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바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저멀리 바다가 보이고 해가 구름을 뚫고 떠오르고 있었다. 한 5분 걸어가면 해변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호와 수빈이가 빛을 가르며 걸어가는 모습에서 도깨비 장면이 보여 또 킬킬대며 다같이 방정을 떨었다. 그렇게 걷기를 한참, 금방 가닿을 줄 알았던 바다는 좀처럼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해변까지 늘어진 길도 끝이 안 보이게 까마득하고, 그쯤에서 작은 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해변이 얼마나 먼지, 사람이 개미보다 작은 점으로 보이는 거였다. 나중에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바람이 더 세차게 불어 훨씬 더 길게 느껴졌다. 차로 돌아와서 지도를 찍어보니 왕복 8Km나 되는 엄청난 거리의 길이었다. 며칠 전 해가 질 쯤, 숙소에서 가까운 Black Sand Beach나 얼른 다녀올까 했다가 주차장을 지나치는 바람에 그대로 그냥 비크만 다녀왔는데, 그때 주차장 들어가는 길을 놓쳤던 게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어스름해질 때 괜히 그 길에 발을 들였다가 빛 한 줄기 없는 까마득한 길을 걸어 들어갔으면 바다에 도착했을 쯤엔 어두운 밤이 되어버렸을테고 돌아오는 길은 무서워서 벌벌 떨며 나와야 했겠지.


화산섬인 아이슬란드엔 현무암이 많아 해변의 모래가 검은 것이라 했다. 정말 모래가 말 그대로 검은색이었다. 특히 파도가 훑고 지나간 젖은 모래는 그냥 검은색도 아니고 지이이이인하고 새깨만 먹색이었다. 홀린 듯 바다에 다가가게 한 건 파도가 칠 때 이는 물보라였다. 파도가 치면 거센 바람이 파도의 머리를 훑으며 지나가 수천 수만개의 물방울이 하늘로 날렸다. 세찬 바람, 거센 파도, 물보라, 그리고 그 모든 소리의 위압감이 온 몸을 휘감았다.


바다를 등지고 다시 점이 되어버린 차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방향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다가 저 멀리 모여있는 사람들을 발견하고서야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을 찾아 나올 수 있었다. 바람에 눈이 섞여 날렸는데, 얼마나 바람이 강한지 눈이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날아갔다. 가로로 날아가는 눈이라니. 바람에 뺨을 얻어맏고 있는 느낌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마도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어제 요쿨살롱에서 한 시간 서있다가 발가락과 손가락이 얼어버린 건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매서운 추위였다. 오늘 기온은 그리 낮지 않았는데, 바람이 워낙에 거세게 부니 5초만 손을 꺼내놓아도 손가락에 감각이 없고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얼어버렸다. 차로 돌아가 패딩 후드를 벗자마자 "아이코 두야" 소리가 절로 나왔다. 머리가 띵하고 특히 미간 살이 너무 너무 아팠다. 진짜 바람이 미간에다 딱밤을 수십 번 먹인 느낌었다. 미간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차에 딱 타자마자 수빈이가 보온병에 담아 온 녹차를 한 잔씩 나누어주었다. 종이컵을 곧바로 이마에다 가져다 대었다. 손과 이마를 녹이면서 가끔 한 모금씩 마셨다. 몇 모금 되지도 않는 차 한 잔의 힘이 정말 크다.


다시 1번 국도를 타고 가다 비크로 넘어가는 언덕 전에 우회전해서 빠지면 디르홀레이에 갈 수 있다. 디르홀레이는 코끼리 바위가 있는 절벽인데, 바위도 바위지만 끝없이 이어진 검은해변이 정말 장관인 곳이다. Black Sand Beach에서 마주한 바다와 모래보다 디르홀레이에서 내려다보는 파도와 검은 해변이 더 말도 안 되는 풍경이었다. 파도가 친 후 거품이 해변에 퍼졌다가 스르륵 밀려났다. 꼭 맥주 거품처럼 새하얗고 진했다. 흰색과 대비되는 모래의 새까만색. 더욱이 물이 막 닿은 모래는 더 검고, 씻겨내려가는 거품은 하얘서 흑백의 대비가 무척 선명했다.


비크로 넘어가는 언덕 중간에 오른쪽 길로 들어서면 레이니스피아라에 갈 수 있다. 디르홀레이는 왼쪽의 곶 쪽에 있고 레이니스피아라는 오른쪽의 곶에 있다. 지도에선 분명히 떨어져있는 그 두 곶이 디르홀레이 절벽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검은 모래 해변으로 이어져있다. 레이니스피아라는 검은 주상절리 절벽이 있는 해변이다.


레이니스피아라는 모래 폭풍이 잦고 바람이 무척 거세다고 알고 있었는데, 차 문을 채 다 열기도 전에 그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생각없이 문을 열었다가는 문짝이 바로 휙 꺾여버릴 기세의 바람이었다. 바람이 주차장에서 해변 쪽으로 불고 있어서 걸어갈 땐 큰 어려움 없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패딩을 때리는 작은 돌멩이들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알고보니 아주 작은 얼음 조각이었다. 얼마나 세게 날아와 부딪히는지 투투투툭 소리가 났다. 서있다가 바람에 떠밀려 주춤거린 것도 여러 번이었다. 처음엔 주상절리에 올라가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사진을 찍으려 포즈를 취하고 있는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육각기둥 뒤에 숨어 바람과 얼음조각을 피해있는 거였다. (물론 사진을 찍는 사람도 있고!) 바람이 갑자기 세차게 불면 우리도 비명을 지르며 육각기둥 사이에 몸을 숨겼다.


차로 돌아왔는데 뒷유리와 사이드미러 양쪽이 모두 작은 얼음조각들이 붙어 꽁꽁 얼어있었다. 뒤에서 바람이 불어오니 비인지 얼음인지 모를 게 날아와 유리에 붙어 그대로 굳어버린 거였다. 손톱으로 긁어도 떼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마구 문질러도 전혀 녹을 기미가 없었는데 핫팩을 가져다 몇 초 대고 있으니 조금씩 녹기 시작했다. 얼어버린 거울을 녹이는 대신 내 손등을 칼바람에게 제물로 내놓았다. 그래도 어쩌나, 거울과 뒷유리는 보여야 출발을 하니까. 그 정도로 어마무시한 곳이었는데, 기온이 고작 영하 3도였다고 해서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영하 3도라고? 체감은 영하 13도인데!


어김없이 해는 금방 지고, 열심히 달려 Eyrarbakki의 숙소에 도착했다. 만오천원에 산 소고기를 다 들이부어 후다닥 볶아서 스테이크로 몇 점 주워먹고, 무를 썰어넣어 소고기무국을 끓였다. 내일 먹을 핫도그용 소시지 다섯 개를 남겨두고 나머지는 파프리카, 버섯, 애호박이랑 볶아서 소시지 야채볶음도 만들었다. 근 며칠 계속 라면이나 찬 음식으로 끼니를 때웠더니 간만에 먹은 이 식사다운 식사가 정말 만찬 같았다. 에스프레소 추출기도 있어서 에피타이저로 한 잔, 디저트로 한 잔 커피를 내려 라떼로 마셨다. 최고다.




배산임수 핫도그

자연 온천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이 있었다. 레이캬비크보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있는 곳인데, 바다와 바로 닿아있는 자쿠지에 뜨거운 물을 채워 들어가면 되는 곳이었다. 아직 유명하지 않은데다 겨울이라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어보였다.


아아아아 하지만 온천에 거의 도착했을 쯤 작은 길로 들어서려고 차를 꺾으려는데 긴 봉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옆엔 대문짝만하게 'Private Road, no trespassing' 사인이 표지판에 적혀있었다. 아, 망했다. 심지어 CCTV도 설치되어 있었다. 작동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저 정도까지 해놓은 거면 사람들이 어지간히 찾아온 모양이었다. 이 정도까지 했으면 진짜 사유지 침입죄로 신고할 수도 있겠다 싶으면서도, 병풍처럼 둘러진 기막히는 풍경을 바라보며 탕에 들어가 몸 녹일 상상을 하니 그대로 발길을 돌리기가 너무 아쉬웠다. 어떻게 생겼는지나 봐보자고 일단 차는 사유지 바깥에 주차를 해두고 산책 겸 걸어들어갔다. 집 서너 채가 보였는데, 하필 온천 쪽 방향에 있는 창고 같은 집에 불이 켜져 있고 그 앞에 차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럼 사람이 있다는 거잖아. 저기가 온천 아닐까 보이는 것 같기도 할 쯤,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막 걸어들어가려던 차에 저쪽 멀리서 남자 한 명이 나타났다! 하필 우리가 가려했던 바로 그 방향에서! 진짜 타이밍도 참. 개를 산책시키고 돌아오는 길인 것 같았다. 여기는 못 갈 운명인가보다 체념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오른쪽 길로 걸음을 옮겼다. 이렇게 빠딱빠딱 걸어가면 굳이 저 사람이 뛰어와 우리에게 따져 묻진 않겠지. 그대로 차로 향하는 길이어서 그저 예쁜 풍경에 홀려 산책하던 사람들인 양 잰걸음을 쳤다. 그러다 얼어붙은 작은 연못을 보고선 다윤이가 들어가 몇 번 밟아보고 움직여보더니 꽝꽝 얼었다며 얼음 위를 스케이트 타듯 미끄러졌다. 이쯤되면 주인도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거리여서 그래 잠깐 놀고 가자, 나도 들어가 김연아 놀이에 동참했다. 이렇게 된 김에 얼음 호수와 높은 산을 앞에 두고 눈을 털어낸 자리에 주저 앉아 점심 도시락을 까기로 했다. 빵에다 소시지, 스크램블 에그, 그리고 케찹을 뿌렸을 뿐인 아주 간단하고 단촐한 핫도그지만 대자연을 앞에 펼쳐두고 먹으니 이만큼 값진 식사가 따로 없었다.


야심차게 수영복까지 다 입고 나왔는데 아이슬란드까지 와서 온천 한 번 못하고 돌아갈 순 없었다. 재빨리 레이캬비크 인근의 온천을 찾아 바다를 바로 앞에 둔 수영장에 가기로 정했다. 인당 600코루나 밖에 하지 않는데 샤워실까지 갖춘, 꽤나 괜찮은 수영장이었다!




못다 적은 이야기

+ 갓길에 차 대고 구경하려다 눈밭에 바퀴가 빠져버린 이야기

+ 숨겨진 보석 같은 에어비엔비, 거실 소파에 앉아서조차 오로라를 볼 수 있었던 곳

+ 뜨또 목소리가 그렇게 섹시한 줄 왜 몰랐을까. Despacito

+ 우리를 숙소순이로 만들어버린 레이븐스 베드

+ 신년맞이하러 핫한 펍 찾아 나섰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던 케플라비크

+ 넣은 건 냉동피자인데 꺼내보니 지옥에서 온 멜티트플라스틱... 집 태워먹을 뻔

+ 닭볶음탕, 푸실리파스타, 달걀샌드위치, 소시지야채볶음, 소고기무국. 매일 저녁 맛있는 냄새 가득한 부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