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 클림트 인사이드 / 핑거팁스 수제버거

2017. 1. 5. 22:14문화생활/전시

2016. 12. 29.


가장 좋아하는 화가를 꼽으라면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구스타프 클림트를 말할 것이다. 내가 클림트의 작품을 처음 만난 것은 아주 어렸을 적, 가족과 여행을 갔을 때 묵었던 숙소 욕실에서였다. 그 숙소에서 가장 비싼, 호텔로 치자면 스위트룸 격인 방이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열면 밤하늘을 볼 수 있고, 바깥에 있는 욕조에 물을 받아 노천탕을 즐길 수 있는 고급진 곳이었다. 그런데 욕실 벽에 나를 몹시도 민망하게 하는 그림이 있었다. 남녀가 부둥켜 안고 볼에 입을 맞추고 있는 그림이었다. 혼자 낯 부끄러워 하며, 나중에 가족들도 다 이걸 볼텐데 어떡하지, 샤워 내내 걱정을 했다. 드라마에서 나오는 (하나도 진하지 않은) 키스를 보며, 배우들이 진짜로 키스를 할 수는 없으니까 인중에 입을 대고 있는 건가, 하고 생각하던 나이였다. 우린 가족끼리 와서 묵지만, 여긴 모텔이니까 이렇게 야한 그림을 욕실에 붙여놓은 건가, 하며 추측을 하기도 했다. 그 외설스런 그림이 사실 세상에서 가장 사랑 받는 작품 중 하나이고, 아주 아주 유명한 화가가 그린 그림이라는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동생이 보던 디즈니 '리틀 아인슈타인'에 클림트의 '생명의 나무' 작품이 나오면서 클림트라는 화가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나중에 클림트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서 내가 어릴 적 숙소에서 보고 얼굴을 붉혔던 바로 그 그림을 발견한 것이다. 혼자 오만가지 걱정을 했던 어릴 적의 내 모습이 하도 우스웠고, 동시에 추억이 얽힌 '키스'라는 그림을 좋아하게 되었다.


클림트의 그림을 미디어아트로 전시한다는 말을 듣자 마자 얼리버드로 티켓을 끊었다. 12월 안에 보아야 해서, 늦기 전에 얼른 다녀왔다.



클림트 인사이드는 '성수 S-FACTORY'에서 열린다. '후진' 철문에 독특한 서체의 안내판을 붙이니 분위기가 그럴싸하다. 괜히 멋져보이고 그렇다.


어쨌거나, 늘 그렇듯 이 전시도 혼자서 보러 갔다. 마침 오디오 가이드도 무료로 들을 수 있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다. 전시 둘이서 보러 가면 각자의 평을 나누며 들을 수 있어서 풍성한 관람이 가능한 장점이 있지만, 혼자서 보러 가면 보고 싶은 작품 앞에서 한없이 서 있을 수 있다는 점과 오디오 가이드를 얼마든지 여러 번 들어도 상관 없다는 점이 장점이다. 핸드폰 화면을 계속 켜 놓아야만 재생이 된다는 게 불편했지만 보조배터리를 챙겨가서 핸드폰이 꺼지는 불상사는 없었다.



'발밑조심'이라는 안내 문구 조차 이렇게 컨셉에 맞춰 준비하다니, 입장부터 그 세심함이 마음에 들었다. 화장실의 휴지 커버도 클림트의 그림으로 장식을 해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정말 클림트의 세상에 들어온 것 같아 막 벅차올랐다.


폰트 이야기는 밑에서 더 하겠지만, 클림트의 독특한 문양처럼 폰트도 정말 개성있는 것을 고른 게 눈에 띄었다. 이집트 상형 문자 같은 느낌도 있고, 오묘하다.




1. End of Century


01. 합스부르크의 황혼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던 오스트리아 빈의 혼란스런 기록들을 무한의 행성처럼 영사해, 거대한 우주의 기록실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천장에 9개의 영사기가 걸려 있고, 넓은 바닥을 스크린 삼아 거대한 우주를 보여준다. 마치 '빈'이라는 행성이 폭발하기라도 한 듯, 세계대전이나 산업혁명 등 빈과 관련된 다양한 사건들이 파편처럼 쏟아진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통치했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제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해체된다. '황혼'은 쇠퇴하여 종말에 이른 상태를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니, '합스부르크의 황혼'이라는 것은 근대로 넘어오며 종말을 맞이한 합스부르크의 흔적들이 마치 흩뿌려지는 빛처럼 키워드로 나타나는 것을 설명하는 것 같다.


아주 넓은 홀을 가득 메우는 화면을 보고 있으면 거기에 빨려 들어갈 것 같아 어질어질해진다. 오디오 가이드에서는 스크린 위를 마음껏 걸어도 좋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죄 갓변을 따라 서서 구경을 하고 있어 스크린 안으로 들어가기가 망설여졌다. 소심하게 테두리에서 살짝 안쪽만 거닐며 나를 향해 날아오는 글자들을 응시했다. 전시장에 입장하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이 작품이 격동기였던 시대적 배경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혼란스럽고 이중적이었던 빈의 상황과 클림트의 이단아적인 성향 사이를 상당히 단단하게 연결하려 한 것 같다.




2. Ver Sacrum


01. 대학천장화


'Ver Sacrum', 라틴어로 '신성한 봄'이라는 뜻인 '베르 사크룸'은 클림트가 빈 분리파를 이끌며 창간한 잡지의 이름이다. 분리파는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만의 고유한 예술이, 예술에는 예술만의 고유한 자유가 존재한다."라고 외치며 기존 아카데미즘이나 관 주도의 전시회로부터 자신들의 예술을 분리하고자 하였다.

클림트의 대학천장화는 기존의 예술 세계를 거부하던 클림트의 생각을 여실히 보여준 작품이었다. 정부는 새로 지은 빈 대학교의 천장화를 클림트에게 부탁했는데, 그가 그토록 보수적인 학문의 공간에 아주 파격적인 그림을 그린 것이다.


천장과 벽면 이곳 저곳에 걸린 스크린에서 사람들이 기대하던 고전 명화가 보여진다. 그러나 그것들은 완전히 부서져 가루가 되어 날아가고, 클림트가 그린 무채색의 천장화가 나타난다. 각각 철학, 의학, 법학을 상징하는 그림들은 딱 봐도 사람들이 흔히 생각할 이상적인 이데아와는 아주 거리가 멀어 보인다. 기대에 차서 그림을 보러 왔다가 고통, 비극, 공포, 충격으로 가득한 이 그림을 마주했을 사람들의 당혹감은 안 봐도 선하다. 클림트가 '이단아'로 불리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케 했다.


아쉬웠던 것은 미디어 아트로 만들어 낸 일련의 동영상이 단순하고 설명적이라는 점이었다. '기존의 명화 - 부서짐 - (우주) - 클림트의 대학천장화'의 순으로 영사되는 그림이 곧 '고전 명화와 같은 그림을 기대한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파격적인 세계관을 담아낸 클림트의 대학천장화'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과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All ART IS EROTIC."


대학천장화에 이어 베토벤 프리즈까지 감상하고 나면 다음 장소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 벽면에 클림트의 명언이 걸려 있다.




3. Woman


01. 쉘터


Shelter, 'a structure that provides privacy and protection from danger'라는 뜻이다. '영원한 안식처'를 뜻하는, 이상적인 순수의 공간이라 한다. 가이드에서는 쉘터가 'Interactive LED Installation 작품'이라고 했는데, 키스를 끌고 와 설명하는 것을 보면 클림트의 키스를 재해석한 작품인 듯하다. 세 공간으로 구성된 쉘터는 각각 물리적인 안식처 - 정신적인 보호막 - 무한대의 평안과 안식을 의미하고, 이곳에서 '키스'의 황홀경을 맛보길 바란다는 설명이 있었다. 많은 연인들의 사랑 넘치는 포토존으로 각광받는 걸 보니, 알게 모르게 작품의 의도는 성공한 것도 같다.




02. 팜므 파탈



한번쯤은 어디에선가 마주한 적이 있는 클림트의 그림들이 줄지어 나오는 미디어 아트였다. 가이드를 듣기 전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감상부터 했다. 악령같은 여자들 사이에 인어공주가 조개 속에 잠들어 있는 듯 고요히 잠든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를 노리는 듯한 빨간 남자가 등장하는데 정말 악마같아 보였다. 잠든 여성의 성기에서 황금빛 기포가 올라가고 있었다. 성스러운 남성과 관계를 맺었다는 걸까, 생각했다. 곧 여왕같기도, 여신같기도 한 황금빛 가득한 여인이 그 악마의 목을 들고 나타난다. 황금빛 용사와 반사경을 들고 있는 수많은 나체의 여자들. 앞서 보았던 '베토벤 프리즈'에서도 그러하였지만, 뭔가를 쟁취하고 승리를 거머쥐는 영광의 주인공은 남성이고, 여성은 축하를 더하는 요정 혹은 병풍에 불과해보여 아름답지만서도 한 켠에 불편함을 남겼다.


설명에 따르면 이 너그러우면서도 무자비한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바다를 배경으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자른 유디트, 황금빛 비가 된 제우스와 사랑을 나눈 다나에가 등장하여 클림트의 여성관을 보여준다고 한다. 황금빛 가득한 여인이 바로 그 유디트였고, 잠든 인어공주 같았던 여인이 다나에였던 모양이다. 유디트가 들고 있는, 악마의 목인 줄 알았던 것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였다. 다나에의 그림에서 황금빛 기포를 보며 성스러운 성교를 추측했던 것이 얼추 들어맞아 설명을 들으며 조금 으쓱하기도 했다. 그런데 원작에서는 다나에의 허벅지 사이로 흘러드는 황금빛 비가, 여기에서는 기포가 되어 오히려 위로 올라가도록 했던데 그것은 무슨 의도일까?


"19세기 말 매춘과 간음이 성행하는 환락의 분위기 속에서 난잡한 성생활로 인해 신체적·사회적 타격을 입은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죄를 전가… 당시 여성들이 정치적·사회적 해방을 요구… 많은 남성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위협받고 있다고… 모순된 클림트의 여성관은 여성에 대한 공포와 욕망을 구체화"


작가나 시대 상황을 제하고 오롯이 그림 만을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때가 있다. 가이드가 설명하는 19세기 말의 상황이 현 시국을 묘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맥이 빠졌고, 그림에 녹아든 클림트의 여성관을 나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고민이 깊어지면서 골치가 아파왔다.



한 가지 더 짚고 가고 싶은 것이 바로 전시에 사용한 '폰트'였다. 기하학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것이 클림트의 화풍과도 잘 어울려서 인상깊었다!



클림트 인사이드는 물론 클림트의 그림을 소재로 했지만, 클림트의 그림을 감상한다기 보다는 '미디어 아트'로 새롭게 재탄생한 작품을 감상하러 간다고 생각해야 기대가 어긋나지 않을 것 같다. 또한 이 전시도 클림트의 작품에 대한 '재해석'으로 여기고 한 걸음 떨어져 감상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 편이 클림트라는 화가와 그의 작품에 대한 기대치를 오히려 더 증폭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겠다. 나는 마지막의 '키스' 재현에 무척 실망해서, 정말 빈에 한 두 달은 살면서 클림트의 그림을 구경하러 가고픈 열망이 간절해졌다.




저녁은 사실 클림트 전시를 보러 가기 전 근처의 유명한 수제버거집 '핑거팁스'에서 먹었다! 패티가 스테이크 같은 느낌!